- 봄과 봄, 봄 그리고 봄
윤은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당황해하며 멀뚱멀뚱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자고 일어났음에도 몸이 무거웠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꺼풀이 실컷 부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 울면서 잠에 든 대가였다. 그렇게 10분쯤 누워있었을까, 윤이 몸을 일으켜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것 뿐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대화를 올려보니 어제 일이 꿈이 아님을 실감했다. 이제 그에게 ‘잘잤어’라고 오지도 ‘잘잤어’라고 보낼 수도 없겠구나. 그 단순한 사실은 윤을 너무 슬프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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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들이 새로워지는 봄의 시작인 3월에 만난 그와 윤은 봄의 끝인 5월에 이별을 결심했다. 그 사이에 계절은 두 번 반복됐고 그와 모든 계절을 경험해서 좋았다. 그럼에도 2년 동안 윤의 시간은 온통 봄이었다.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그를 만나러 가는 모든 길에서 윤은 설레었다.
처음 1년 간 윤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그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좋았다. 윤은 자신이 살아있음에 처음으로 감사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와 함께 걷는 일이었다. 같은 학교인 그와 함께 손을 잡기도 허리를 감싸 안기도 하면서 학교 이곳저곳을 천천히 걷는 일. 아쉽게도 기억은 이미 증발해버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쉴 새 없이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았지만, 분명 별 얘기 아니었음에도 그와 함께 하면 즐거웠다. 산책이 끝나면 학교 쪽문의 포장마차에서 따뜻한 어묵을 호호 불어먹었다. 그와 헤어지는 순간이 못내 아쉬워 윤은 어묵을 조금 천천히 먹기도 했다. 그런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사랑하면 이렇게 바보가 되는구나 생각했다. 그도 아쉬웠는지 윤의 집 앞에서 그녀의 손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내일 봐’ 라는 말에 그가 자꾸 대답을 하지 않아 윤은 그 말을 반복해야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여워 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가 윤은 참 좋았다. 그때의 윤은 그 하루들이 항상 존재할 거라는 무분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서서히 그와 맞지 않는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고 부딪히는 일들이 빈번해졌다. 다툼이 일어나면 윤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들여다 본 후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반면 그는 즉시 문제를 해결하길 원했다. 윤과 그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했기에 겉으로 보기엔 어디서나 당당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의 자존심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한 보호막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윤은 그가 자신에게만큼은 어떤 모습이든 숨기질 않았으면 했다. 그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얘기할 때마다 그를 이해하고 감싸주려 애썼다. 그의 곁엔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었다. 윤은 그에게 자신이 큰 존재이길 바랬다. 하지만 그는 그런 윤을 비웃었다.
‘비가 오면 천장에 물이 새는 집에서 살아봤니?’
그렇게 한마디를 던지면 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말이 그에게는 동정으로 들렸다는 생각에 윤은 더 이상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난감했다. 혹시나 그가 자존심 상해할까봐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사실 윤은 그가 천장에서 물이 새는 집에 살든, 방학 때마다 막노동으로 학비를 마련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윤은 그저 그가 좋았다. 하지만 그 또한 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했다. 윤이 무슨 말을 하든 그는 ‘너는 몰라’ 라며 코웃음을 쳤다. 윤은 마음이 아팠다가 나중엔 화가 났다.
그렇게 몇 번의 다툼이 반복되니 그와 윤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벽이 생겼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명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윤은 그 벽이 느껴질 때마다 갑갑하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즐거웠고 행복했지만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윤은 그의 손을 자꾸만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여전히 잘 웃었지만 그녀를 보고 웃는 순간은 드물었다. 윤은 점점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갔고 그와의 만남의 횟수는 줄어갔다. 그가 매일 밤 수줍게 말하던 사랑한다는 말도 이젠 듣기 힘들어졌다. 더 이상 그는 윤의 집 앞에서 서성이지 않았고 오히려 빨리 집에 들어가기를 재촉했다. 작은 벽은 자꾸만 높아져갔다.
윤은 그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자신을 자책하기도 그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을 억누르니 몸이 아파왔다. 윤은 자신이 안쓰러웠다. 이미 수많은 다툼을 거친 뒤라 또다시 갈등을 일으켜 마음을 헤집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윤은 처음으로 그와의 이별을 생각했다. 이별이라는 단어는 윤에게 너무나도 낯설고 두려운 것이었다. 어떤 모양의 이별이든 겪어본 적이 없었던 윤은 그와 이별 후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별을 하면 많이 슬플지 혹은 오히려 후련할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한폭탄 같은 지금의 상황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윤은 결국 그에게 말을 꺼내는 쪽을 선택했다. 예상했던 대로 대화는 아슬아슬하게 흘러갔고 몇 번의 눈물과 고함, 숨 막히는 침묵이 반복됐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헤어지는 거 생각보다 어려운 일 아니야.’
일주일의 시간을 갖기로 하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주일은 그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는 사실을 윤은 알고 있었다. 이제 윤은 이별을 상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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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 눈물로 뭉쳐있는 휴지들을 쓰레기통에 주워 담았다. 몸을 씻고 어수선한 방을 청소했다. 너저분한 주변은 그동안 자신을 돌보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방을 정리하다보니 자꾸 그와 관련된 물건들이 나왔다. 함께 찍은 사진, 서툴게 적은 손편지, 더 줄 수 없어 안타까웠던 선물들. 일주일 전만 해도 그의 흔적들은 윤을 무너지게 만들었는데, 이제 그것들은 윤을 더 이상 아프게 만들지 못했다. 윤은 지난 2년 간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의 흔적들을 버리지 않고 상자에 담아두었다.
핸드폰을 키고 그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제 곡선이 아니라 직선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헤어지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그의 말을 윤은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