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옛 직장 동료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때마침 걸려온 딸아이와의 짧은 통화를 끝내자 옆에서 듣고 있던 후배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을 건넸다.
“선배님은 집에서 엄한 엄마 맞죠?”
“나? 아냐! 절대 아니야.” 펄쩍 뛰며 강한 부정을 했지만 대화만 듣고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한다는 게 은근히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내 아이들과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동안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는지 되짚어보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누었던 기억에 남는 몇 가지 대화가 떠올랐다.
친구들에 비해 늦게 결혼을 한 내게 첫 임신은 특별했으며 우주의 수많은 인연 중 콕 집어 나에게로 와준 아기를 위해 뭐든지 다할 준비가 되었다. 두뇌가 좋아진다는 날콩을 갈아먹고 손바느질이며 태교음악과 그림으로 아가맞이를 준비하면서 가장 열심이었던 건 아기와의 태담이었다. ‘딸이든 아들이든 친구 같은 엄마가 될 거야’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고 존중하는 그런 멋진 엄마를 꿈꾸며 뱃속의 아이와 소소한 일상적인 대화부터 때로는 감정 기복으로 인해 깊숙이 숨겨진 슬픈 진심을 끄집어내 찔끔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럴 때면 뱃속에서는 물속에서 튀어 오르는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파장으로 답해주던 게 내 아기와의 첫 대화였다
애들이 날 보고 강아지래
5살이 되어 유치원을 다니는 딸을 위해 내 취향으로 옷을 골라 어릴 적 인형놀이하는 것처럼 입혀 데리고 다니는 즐거움은 딸 가진 엄마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어느 날 예쁘게 진열되어 있는 달마티안 패턴의 스커트와 모자 세트를 구입해서 흐뭇해하며 아이에게 입혀 등원시켰는데 한번 입은 뒤로는 더이상 안 입겠다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에게 입지 않을 거면 아무데도 갈수없다고 엄포를 놓자 아이는 엉엉 소리 내어 억울하다는듯이 울어댔다. 그렇게 한참을 어르고 달래다
“울지 말고 왜 입기 싫은지 정확히 말을 하면 엄마가 허락할게” 말하자 딸아이는 그제서야 훌쩍이며
“그거 입고 갔더니 남자애들이 강아지라고 놀렸단 말이야."라고 대답했다.
"뭐라는거야?" 하지만 이내 무슨 상황이었는지 감이왔다.
‘아! 101마리 달마티안……디즈니 동화에 나오는 달마티안 강아지가 맞네.’
순간 나의 경박한 행동이 부끄러웠고 딸아이가 아이들한테 놀림을 받았을당시 얼마나 창피했을까 화끈거렸다. 확실히 어른이 보지못하는 능력이 아이들한테는 있었다. 엄마가 미안.
"00야. 엄마가 미안해 . 그런줄 몰랐네. 이제부터 그 옷 안입어도 돼."
그 이후로 난 내 맘대로 옷을 구입하지 않았다......
엄마! 친구들 엄마는 엄마랑 달라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친구관계 폭이 넓어져 같은 반 아이들을 집에 데리고 와서 놀기도 하며 우르르 몰려다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가족 얘기를 하곤 했는데 한 번은 친구 집에서 숙제를 하고 돌아온 아이가 잔뜩 골이 나서 들어왔다.
“엄마! 나 00랑 싸웠어, 날 보고 거짓말쟁이라고 하잖아! 이제 걔랑 안 놀 거야!”
“그래? 친구는 왜 우리 00한테 거짓말쟁이라고 했을까. 엄마도 궁금한데?”
“개네 엄마는 화나면 막 소리 지르고 00한테 욕도 해. 그래서 내가 우리 엄마는 화나면 웃는다고 했더니 00가 뻥치지 말라고 하잖아! 엄마는 진짜 화나면 웃잖아. 맞지? ”
아이를 키우다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온 곤 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쪼끄만게 나름 이유있는 설명을 늘어놓는데 어이가 없어 나오는 웃음이 천진 나만한 아이의 눈에는 올 곧이 엄마의 미소로 받아들여져 엄마는 화가 나면 웃는다라는 표현을 하고 다니니 싸울 수밖에. 자금도 그 버릇은 여전히 고쳐지지가 않는다.
엄마! 말투가 왜 그래?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던 중2병이라고 했던가? 공부보다는 외모에 관심이 많아 얼굴에 분칠을 하고 다니기 시작하고 맨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뭐가 그리 비밀스러운 건지. 나보다 친구들과 떠들기를 좋아했다. 어느날은
학부모 면담차 학교에 다녀온 날 저녁에 슬며시 내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무슨 변덕에 마주 앉아 학교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사건사고를 조잘거렸는데 얘기인즉 아이들이 학교에서 나를 보고
"야! 00야. 너희 엄마는 여성스럽고 말도 조근조근 하시는게 너랑 하난도 안닮았어." 라고 했단다.
아마도 엄마에 대한 좋은 평이 신났던 모양이다. 예쁘장한 외모와 달리 천방지축 남성적인 성격에 중저음 목소리로 괴짜가 돼버린 딸이 못마땅해서 좀 더 예쁜 말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하면 되려 피식 웃으며
“엄마 말투는 좀 그래. 오글거리고. 으으으~ 흉내도 못 내겠어.” 몸을떨며 질색한다.
나원. 야! 너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이런 엄마가 좋다며……
앞자리 숫자가 바뀌면서 점점 뜸해지는 딸과의 대화. 엄마가 최고인 줄만 알더니 이제는 독립적이려는 아이에게 섭섭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식한테 올인하며 평생을 보내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같은 클리셰는 거절하기로 진즉부터 마음먹고 나 스스로를 위한 삶을 준비하는 엄마가 되었다.
과거 내가 들었던 ‘엄마의 애완견’이란 꼬리표를 내 딸은 안 들었으면 했는데 다행히 아이는 혼자힘으로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학생이 되어 첫 리포트 작성을 못하겠다고 징징거려 결국은 대신해주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조별 과제를 낑낑거리며 해내는 것도 대견하고 전공실습을 나가는 모습도 기특하다. 그래. 그냥 믿고 지켜봐 주는 것도 좋은 엄마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