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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 Grace Mar 24. 2024

프롤로그

기억의 순서

나에게 고양이란


녹음 짙은 가로수가 쭉 뻗어있는 주택가로 들어서자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나뭇잎들끼리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그놈은 어디선가 은밀히 몸을 낮춰 나를 살피고 있을 것이다. 


분명 내가 자기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텐데도 시종일관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들이대왔다. 불쑥 나타나 내 보폭에 맞춰 다리 사이로 무심히 스치다  벌러덩 눕기도 하고 어느 날은 나무 위에서 어깨로 점프해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면 '흥! 너 따위한테는  관심 1도 없다'는 듯 이 앞장서서 요염하게 걷기도 했다. 


낯선 외국생활에서 적응하기도 전에 만난 그놈은 나에게 외로움 다음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중에야 두 집 건너 이웃인 이탈리아 노부부가 키운다는 것과 '로미오'라고 불리며 아침에 나가 집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만인의 연인이기를 바라는 관종 수컷고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항상 집에 들락거릴 때마다 주위를 살피거나 지인이 동행이라도 하는 날이면  붙잡아주는 틈에 쏜살같이 달려 가곤 했는데 귀국 직전까지 그 짓을 한 것도 생각해 보면 대단한 루틴이었다. 


나한테 로미오는 겨울밤에 만나는 무섭고 음침한 까만 고양이이었던 기억밖에 없다......


                                   검은 고양이 로미오                                            


그리고 두 번째 기억


'헤이즐'이라고 소개하는 그녀는 캐나다에서 <랙돌이라는 품종묘> 브리더를 했었다고 한다. 

러시아라고 했었나? 그 먼 곳까지 달려가 식구로 맞아 새끼를 낳아 키우고, 새끼가 자라 또 새끼를 낳고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들까지 11마리 대식구의 일상을 담은 따뜻한 영상을  보면서 문득 '로미오'가 떠올랐다.

 

만일 그때 이웃이 헤이즐이었고 귀족처럼 우아한 꼬리를 살랑대는 랙돌을 봤다면 겨울의 음침한 추억이 아닌 흰 눈처럼 소복한 추억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 두 번 영상을 즐기다 구독까지 하면서 11마리 고양이의 이름까지 외우게 되었고 이름이 예쁜 아이. 왠지 아웃사이더 같은 아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아이가 생기면서 힐링이 되기 시작했다. 저런 아기들과 함께 지내면 어떨까? '응? 너 고양이에 대해 아는 게 하나 없고 키원본 적도 없는데...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양이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그... 렇지? 내가 무슨 집사야. 있는 자식도 감당 안되면서 누가 누굴 키운다고...... 그냥 예쁘게 키우는 모습 보는 거로 대리 만족이나 하면 되었다. 그 후로도 정신없이 일상을 보내다 가끔 고양이 영상을 이곳저곳 눈팅하는 소소한 재미를 느끼곤 했다. 


그러다 나의고객 (산모)을 두고 마치 고양이와 같아서 나는 그들을 섬기는 '우아한 집사'라고 칭하면서 고양이는 나에게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닌 사랑이로 바뀌었다.





새로운 기억으로 남겠지......


“추가근무나 야간 근무 가능하세요?”

“”… 아뇨.  실은 집에 고양이들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해요…“ 

'아니 고양이가 얼마나 있길래 업무시간까지 포기를 한다고?' 그녀는 키우는 고양이가 새끼를 낳아서라고 했다. '아! 헤이즐이구나' (브리더란 말보다 왠지 더 친근한 표현)

그래요? 저 고양이 관심 많아요. 자주 보는 영상이 랙돌고양이인데…. 저 랙돌 좋아하거든요..”

“어머! 새끼고양이가 랙돌인데…. 인연인가 봐요..... 키우시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호호호” 


실제로 랙돌은  대면한 적 없이 영상으로만 봤었는데…. 랙돌이라니…. 신기했다. (사실 그때까지도 내가 고양이를 키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러 마리를 거둘 수는 없는 상황이라 정 안되면 펫샾으로 보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입사할 회사에서 키운다면 가까이서 늘 볼 수 있으니 안심이 될 거란 이야기도 슬쩍 내비쳐 맘이 흔들렸다. 

하지만 품종묘 분양가가 꽤 높은 걸로 아는데 선뜻 받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한 두 달 키울 거도 아니고 … 섣불리 입양결정을 내릴 수 없어 하루만 생각해 볼 시간을 갖기로 했다. 


로미오는 아직 그곳에서 살고 있을까?

불현듯 로미오가 왜 떠오르는지 몰랐지만 내 기억 저편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까만 고양이 로미오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너를 피하기만 해서 미안.                                        2024년 고양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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