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화
숙취에 목이 갈라지는 듯한 갈증으로 수화는 새벽부터 일어나 생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오늘 역시 제시간에 출근하기에는 무리인 것 같아 핸드폰으로 오전 휴가 결재문서를 올렸다. 어제 저녁 지혜와 있었던 일이 생생히 기억났다. 택시를 타고 집에 와 침대에 쓰러진 것까지 모두 떠올랐다. 문서를 올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한참 지났을까 언제 잠든 지도 모른 채 핸드폰 알람에 눈을 떴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의 짐은 덜은 듯했다.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욕실로 가 세면대 앞에 섰다. 얼룩이 드문드문 남은 세면대 거울로 보이는 정수리에 새치 세 가닥이 보였다. '또 생겼네..'
씻고 나온 수화는 머리를 말리고 온몸에 향수를 둘렀다. 출근길, 간단히 식사를 하기 위해 조금 일찍 나서 샌드위치 가게로 향했다. 점심시간 전, 애매한 시간이라 가게는 한산했다. 샐러드와 수프 세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손님이 수화뿐이라 수프는 금방 준비가 되었고 수화는 한입 떠먹었다. 따뜻한 수프로 속을 데우니 숙취가 가셨다. 이대로 출근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을 하고 퇴근하면 되었다.
수화와 달리 제시간에 출근한 지혜는 사무실에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혜가 자리에 앉자 정윤이 메신저로 인사를 건네왔다. 지혜는 아직 그녀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 상태라 아무 일 없다는 듯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불편했다. 지혜의 마음을 느낀 듯 정윤이 점심을 같이 할 것을 제안했다. 수화의 휴가 연락을 개인적으로 받은 지혜는 정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해야하는 만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 없다 느낀 지혜였다. 여느 때처럼 사무실은 조용했고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팀장이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말과 함께 자리를 떴고, 이과장은 지혜에게 점심을 따로 먹겠다는 메시지를 받아 대리들에 이어 자리를 떴다.
"뭐 먹을래?"
정윤은 지혜와 사무실을 나서며 물었다.
"아무거나요"
"밥으로"
"초밥 먹으러 갈까?"
"초밥?"
"초밥 먹으러 가기엔 늦은 거 같은데"
"지금 가면 사람 많을 거예요."
"가보자"
"많으면 다른 거 먹지뭐"
지혜는 정윤의 제안에 일단 따라나섰다. 마음이 완전히 풀리지도, 안 풀리지도 않은 무언가 걸리는 상태라 은근히 정윤을 통해 해소되길 바라기도 했다. 다행히 초밥가게에는 자리가 있었고 2인용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지혜는 정윤의 진심이 궁금했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말 말고, 정말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부정적인 얘기엔 아니라고 할 것이 뻔했기에 직접적인 질문은 할 수 없었다. 정윤의 아니라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힘들었다.
"아직 화났어?"
"아니요"
"실망한 거예요"
"... 응"
진지한 분위기를 깨듯 주문한 초밥 세트가 세팅되었다.
"제가 바보 같아요?"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난 항상 네가 도와줘서 너무 고마운데"
".."
정윤의 말에 울컥한 지혜는 마음을 숨기려 초밥을 집어 먹었다. 그냥 그녀의 말을 믿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수화씨가 내가 뭐라고 했대?"
"삼자대면 하자고 할까?"
"아니, 그러지 말아요"
"수화씨는 할 수는 있지만 정확히 기억은 안 난대요"
"..."
"그래도 네가 마음이 계속 불편하니까.."
"아니에요"
"제가 풀게요"
정윤은 지혜가 안쓰러웠지만 본인의 잘못으로 일이 얽힌 것이 미안해 더 이상 그녀를 보챌 수 없었다.
"응.."
지혜 역시 양쪽 말로는 확인할 수 없는 일들로 더 이상의 감정소모는 하고 싶지 않아 이대로 털어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동료로서 보아왔던 정윤의 모습을 믿기로 했다.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남은 것은 어제 저녁 수화와 헤어지며 들은 말이었다. 피해자 코스프레를 잘한다고?
마침 오후에 대표와 영업팀 회의로 퇴근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수화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카페에 앉아 여유를 즐기기에는 부족한 시간에 테이크아웃해 정윤과 걸으며 오후 일정을 나누었다. 회사 건물 앞에 다다르자 정윤은 다녀오라며 인사하고, 지혜는 영업팀 사무실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10분 정도 남았던 터라 영업팀은 자리를 비운 직원들이 꽤 있었다. 지혜는 수화 역시 아직 자리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수프와 샐러드로 점심을 때운 수화가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참에 회사 앞에서 헤어지는 정윤과 지혜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둘이 먹었구나. 과장님은 안 계신가. 수화는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속도를 유지하며 사무실로 향했다. 지혜가 영업팀 건물로 향하는 걸 보며 오후에 있을 회의가 떠올랐다. 수화는 복도에 오가는 직원들에게 조용히 끄덕이며 인사했고, 사무실에 들어서 자리에 가방을 올렸다. 지혜는 어디 있지. 수화는 고개를 돌려 둘러보다 회의실로 향했다. 지혜는 회의실 테이블에 놓인 갑티슈와 이유 없이 놓인 종이 몇 장을 치우고 있었다.
"지혜씨"
"어, 왔어요?"
"오늘 회의 있는 거 알지?"
"아."
"응"
"생수 사둔 거 있어?"
"그거 좀 갖다 줘"
"응"
"몇 개나?"
"영업팀 몇 명 들어와요?"
"아..."
"..."
"팀장님한테 물어봐줄래?"
"응"
"잠깐만"
수화는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지혜를 두고 자리로 돌아와 한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오늘 회의에 몇 명 들어가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수화는 전화를 끊고 탕비실에서 생수를 챙겨 회의실로 갔다.
"네 분 들어가신대"
"그래? 그럼 여기, 여기 두자"
"응"
"한팀장님 이거 사용하시는 방법 아시지?"
"글쎄.."
"두면 알아서들 하시지 않을까"
"하.."
"언제 오신대?"
"모르는데..."
"물어볼까?"
"습.."
"아냐"
"오시면 내가 설명해 드려야겠다"
"내가 설명할 동안 대표님 차 좀 만들어줘"
"응"
"알았어"
노트북과 스크린 빔 연결을 마친 지혜가 회의실을 나서자 수화도 따라 움직였다.
"어, 오셨어요?"
지혜와 수화가 회의실에서 나오자 한팀장과 회의에 참여할 직원 셋이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혜가 한팀장에게 스크린에 띄울 자료를 요청하자 그 옆에 있던 영업팀 대리가 나섰다.
"아, 그거 제가 드릴게요"
"그럼 제가 사용하는 거 알려드릴게요"
지혜는 회의실로 들어가기 전, 수화의 어깨를 살짝 터치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표님이 오시면 알려달라는 말을 전했다. 수화는 지혜의 말에 끄덕이며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 입구에 대표가 들어섰고 수화는 일어나 그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에서는 영업팀 대리와 지혜가 PPT를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혜는 대표에게 인사하고는 수화와 회의실에서 나와 탕비실로 향했다.
"티백 어디 있어?"
"아, 여기"
지혜는 티백을 우린 차 한잔을 들고, 회의실에 들어가 대표에게 건네주고 나왔다.
"휴"
"나도 한잔 마셔야지"
지혜는 정수기에 물을 받으며 차 한잔을 더 만들었다.
"과자 좀 먹을래?"
수화가 탕비실에 사다 둔 과자를 꺼냈다.
"그래"
"쉴 데 없나?"
"나가서 먹자"
지혜는 과자 몇 가지를 집어 들었고, 수화는 자신을 따라 오라며 종종 혼자 시간을 보냈던 아지트 같은 곳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지 않는 위층 복도에 소파만 덜렁 놓인 공간이었다. 지혜는 소파에 털썩 앉더니 컵을 창가에 올려두고 과자를 뜯어먹었다. 그 옆에 수화가 살짝 떨어져 앉았다.
"오늘 정윤씨랑 밥 먹었어?"
"응?"
"응"
"뭐 먹었어?"
"초밥"
"맛있었어?"
"응"
"오, 근데 너 옷 샀어?!"
"분홍색 잘 어울린다!"
"엉?"
"응"
지혜는 정윤에게 관심을 보이는 수화의 대화 주제를 피하려 다른 말을 꺼냈다.
"너는 웜톤이야? 쿨톤이야?"
"음, 보자.. 분홍색이 잘 어울리니까.."
"..?"
"..."
"글쎄"
"퍼스널컬러 검사 해보고 싶긴 했었는데"
"너는 쿨톤 같아!"
수화는 잠시 버퍼링이 걸리는 듯했지만 정윤의 말에 따라 맞장구를 쳤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거 공부했던 사람 있는데"
"그건 그냥 재미로 한 거 같더라구"
"그럼 뭐 하는데?"
"르메 디자이너야"
"와!"
"그런 사람도 알아?"
"응?"
"응"
"그럼 일 하면서 유명한 사람 많이 보겠다!"
"또 누구 알아?"
"어?"
"누구?.."
"유명한 사람 만난 적 있어?"
"디자이너 친구랑 친해서 그 연예인이랑 밥 먹은 적도 있어"
"와!"
"그럼 그런 사람들 이용해야지!"
"네가 그런 사람들 아는 줄 몰랐어!"
'...?'
"너는 이용 잘해?"
"알면 했지!"
"어제 너 피해자 코스프레 잘한다고 했지."
"아~응응"
"그거 아는 사람 잘 없는데"
"내 친구 중에 나한테 그 말 한 애가 있거든?"
"날 한 번에 알아봐서 놀랐잖아~"
'진짜구나..'
지혜는 신나게 말하는 수화 앞에서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떠올렸다.
"그래서 영업팀 강대리가 나한테는 화 안 낸다?"
"왜?"
"내가 한팀장님한테 강대리님 무섭다고 하고"
"강대리님 앞에서는 이렇게 하거든"
수화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어깨를 움츠리는 동시에 미간을 찡그려 그녀의 팔자 눈썹이 도드라졌다.
"근데 다 가짜야 가짜"
"파하하"
지혜는 그녀가 밝힌 진심에 콕 집을 수 없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수화와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근데"
"요즘 정윤씨랑은 어때?"
"응?"
"..."
수화는 자신이 뱉었던 말과 정윤에게 화가 났던 지혜의 모습, 오늘 보았던 둘을 떠올리며 계속 궁금했던 질문을 겨우 다시 꺼냈다.
"그냥 뭐"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니까"
"그게 다야"
"그래?"
"응"
"네 마음은?"
"괜찮아"
"그래 뭐, 네가 괜찮으면 됐다"
지혜와 정윤의 연결고리가 같은 사무실뿐이라는 무미건조한 대답에 안심이 된 수화는 미묘하게 화색이 돌았고 말을 아꼈다.
"이번 주말엔 뭐해?"
수화가 다시 꺼낸 정윤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지혜는 그녀의 의도를 경계하며 주말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친구들이랑 놀기로 했어"
"어디 가는데?"
"나도 갈래!"
"주말에 심심해, 나도 놀고 싶어!"
"응?"
"..."
수화는 입술을 다물고 곤란하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
"왜?"
"나는 그냥 회사 동료라서?"
"회사에서만 나 데려다주고, 해달라는 거 해주는 거야?"
"네 편이 필요해서?"
"..."
"영업팀 직원들이 자꾸 나한테 친구 없냐고 불쌍하게 봐.."
"알겠어"
"그럼 그렇게 안 보이게 해 줄 테니까"
"너도 나한테 필요한 걸 해줘"
"응.."
지혜 역시 주말 약속에 가겠다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지만 수화에게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자신을 대하는 수화의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그녀가 자신을 동료 이상으로 생각했다면 주말에 심심하단 말에 수화의 친구들과의 약속 자리가 아니더라도 남은 날을 약속한다던가, 다른 선심을 베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심을 들킨 듯 수화는 말이 없었고 지혜는 받아들였다. 지혜는 이제 수화의 진심을 알았고 그렇다면 회사에서만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으면 되었다.
하지만 지혜의 진심이 다시 정윤에게 향한다는 것이 느껴질 때면 수화는 묘한 경쟁심과 질투심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을 끝내지 못했다. 그동안 어떻게 공을 들였는데.
"그리고 나 이번 주 토요일에 정윤씨랑 오마카세 먹으러 가기로 했어"
"?"
"진짜?"
"응~"
"나는 해산물 좋아해서 친구들이랑 한 번씩 오마카세 가고 그랬거든"
"너는 회사에서만 잘 지내주면 된댔지?"
수화는 지금 이 순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수화가 원한 것은 지혜가 아니라 지혜와 정윤의 단절 그리고 정윤의 고립으로부터 얻는 우월감이었다. 수화의 정수리에 올라온 하얀 새치가 어느새 열가닥 정도 되었을까 눈여겨 보지 않아도 눈에 띌 만큼 군데군데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나도 오마카세 좋아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