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나른한 금요일, 아침부터 더위로 진이 빠진 사람들은 사무실 에어컨 바람에 땀을 식히며 점심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각자의 텀블러 속 얼음만이 달그락 거리고 있었다.
"오늘 점심 뭐 먹죠?"
정윤과 지혜, 수화의 단체 채팅창에 메시지가 떴다. 정윤이 단체 채팅창에 점심을 언급하며 점심시간 30분 전임을 알렸다. 지혜는 밥이면 아무거나 좋다는 뜻을 밝혔고 수화는 초밥이 어떻냐는 이야기를 꺼내었다. 정윤 역시 초밥이 나쁘지 않은 메뉴였기에 정확히 메뉴를 언급한 수화의 의견대로 근처 초밥 가게로 향하였다.
"여기 점심시간 한 시간을 꼭 지키나봐요.."
주문한 초밥을 먹으며 수화가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딱히 할 일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던 수화는 사무실이 여간 갑갑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거 같아요. 다들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시더라고요"
정윤이 사무실 분위기를 언급하며 어쩔 수 없다는 의사를 표했다. 수화는 자신이 들은 지인의 회사 점심시간을 언급하며 여기 분위기가 너무 삭막하다고 하였다. 정윤과 지혜 역시 일부 동감하며 맞장구를 쳤다. 직장인들에게 한줄기 빛 같은 점심시간이 숨을 돌리는 시간이었기에 누구나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돈을 벌기 위해 나간 회사의 주어진 규정을 지키는 것이 의무였기에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다니는 것이 직장인의 비애라는 것을 정윤과 지혜는 알고 있었다.
"근데 수화씨 어제 왜 그쪽으로 갔어요?"
지혜는 정윤과 의아하게 생각하였던 수화의 퇴근길 방향에 대해 질문하였다.
"아.."
"약속이 있었어요..."
"불목 보내셨구나! 어디에서 놀았어요? "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수화가 말끝을 흐리며 당황스러워하자 정윤은 어색함을 풀려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지혜는 과하게 움츠러드는 수화의 반응을 보며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수화는 약속뿐 아니라 더 편리한 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구태여 보태지 않았고 때맞춰 생긴 약속으로 거짓은 아닌 대답을 하였다.
진의는 숨긴 채 일부의 사실로 답하는 수화의 대화법이었다. 가면 쓴 사회생활 속에서 굳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화의 마음속 저변에는 항상 '나'를 위해서였지만 상대를 위한다는 말로 곧잘 숨겼다. 그 마음을 들키는 것이 가장 수치스러웠다. 내비치지 않은 마음이 꿰뚫릴 때면 비틀린 분노로 발현되기도 했고 감정적 동요가 잘 되는 여린 사람에게는 일부러 그 마음을 내비쳐 자신의 방패로 만들었다. 그런 관계와 이용 방식이 수화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정윤과 지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손에 들고 그 옆에 선 수화는 얼음이 갈린 프라푸치노를 들고 사무실로 향하였다.
"다음 주부터 영업팀으로 가신다고요?"
정윤은 회사 건물로 들어서며 수화에게 다시 확인하였다.
"네.. 그래도 저랑 같이 점심 먹어주셔야해요..!"
"그럼요~"
수화는 사무실이 달라져 소외될까 마음속에 있던 말을 얼른 꺼내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혼자가 된 외로움이 어쩌면 회사에까지 번져 오로지 혼자가 될까 두려웠다.
"먼저 들어가세요."
지혜는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 정윤과 수화를 먼저 보냈다. 사무실에 있는 층의 화장실은 편하게 사용하기 어려운 터라 직원들은 종종 각자만의 아지트 같은 곳을 찾아다니곤 했다. 정윤과 둘이 남은 수화가 기회를 엿보다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지혜씨는 계약직인가요?"
"음, 네"
"몇 개월 계약하신 거예요?"
"2년으로 알고 있어요."
"정말요? 알아보니 전에는 11개월 계약했던데"
"...?"
"그럼 퇴직금 나오시겠어요"
"그렇겠죠?"
수화의 연이은 질문들이 정윤은 의뭉스러웠다. 수화는 직원과 단 둘이 있을 때 하나씩 정보를 모아 회사의 분위기 파악에 집중하며 속거나 손해 보고 있는 것은 없는지에 집중하였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나의 이해득실이었기에.
"주말 잘 보내세요."
퇴근을 알리듯 정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서자 지혜도 뒤이어 사무실을 나섰다. 수화 역시 바로 가방을 챙겨 복도에 있는 정윤과 지혜에게 가볍게 인사를 끄덕인 뒤 어제와 마찬가지로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네, 다음 주에 봬요."
정윤과 지혜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퇴근이 늦어지는 거 같아 계단을 이용하였다. 정윤은 점심시간 때 수화가 지혜가 없는 틈에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본 것이 내심 거슬려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도 약속 있으신가?"
"글쎄요"
"아까 나한테 지혜씨 계약직이냐고 계약기간 물어보더라"
"그걸 왜?"
"몰라, 전에는 그렇게 계약 안 했었대."
"...?"
"주말 잘 보내~"
"정윤씨도 주말 잘 보내세요~"
지혜는 정윤에게 들은 수화의 질문들이 께름칙했지만 여의치 않고 얼른 집으로 가 휴식을 취할 생각으로 가득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여유로워진 시간적 여유에, 외로움으로 몸부림치던 수화는 친구들에게 만남을 제안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쉬고 싶다거나 바쁘다였다. 남자친구와 단짝으로 지내던 탓에 연애기간 동안 친구들에게 소홀해졌던 터라 헤어진 후 친구를 찾는 수화가 내심 얄미워 만남을 피한 것이다. 절연을 하기에는 아쉽고 수화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다. 친구들의 거절에 침대에 누워 적적한 마음을 유튜브를 보며 채웠다.
'짐도 정리해야 하는데.. 하..'
길었던 연애기간으로 수화의 집에는 남자친구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세월의 흔적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울컥했다. 미련이 아닌 끝났다는 정리의 신호였다.
따분한 월요일, 대리와 팀장이 자리를 비워 사무실에는 이과장과 정윤, 지혜뿐이었다. 평소 박대리, 권대리와 점심을 먹던 과장이 먼저 점심 이야기를 꺼내었다.
"점심 뭐 먹을 거야?"
"음.. 글쎄요?"
정윤이 지혜를 슬쩍 보자 지혜가 머뭇거리다 일어났다.
"아직 못 정했는데 과장님 뭐 드시고 싶으세요?
자연스럽게 이과장과 정윤, 지혜가 점심을 먹기 위해 일층으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수화가 같이 점심을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정윤이 사무실을 나서면서 수화에게 연락해 일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과장 옆으로 정윤과 지혜가 나란히 서고 수화는 느린 걸음으로 뒤따라 걸었다. 정윤이 슬쩍 뒤돌아 보며 수화가 오고 있는지 보았다. 수화는 자신의 걸음걸이로 천천히 따라 걸으며 앞서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혼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빠른 걸음으로 따라 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를 좋아했다면 내 옆에 서 줬겠지.
식사를 하며 수화의 옮긴 자리가 어떤지, 정리가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가득 채웠다. 식사 후 당연한 코스로 카페로 자리를 옮겼고, 도착한 순서대로 정윤이 먼저 앉았고 지혜가 그 옆으로 가 앉자, 과장과 수화가 자연스럽게 나란히 앉았다. 수화는 나란히 앉은 정윤과 지혜를 보다 애꿎은 커피잔만 만지작 거렸다.
"수화씨는 집에 갈 때 어디로 가? 위로 가면 더 빠른가?"
"아.. 네, 관리팀 사무실 쪽에서는 위로 가서 타면 조금 더 빨라요."
"지금 사무실 쪽에서는 내려가서 타는 게 낫더라고요."
수화의 집 위치를 알고 있던 과장이 먼저 말문을 텄다. 그 대답을 들은 정윤은 지혜와 자신이 가는 반대 방향으로 퇴근하던 이유가 오로지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굳이 정윤과 지혜를 따라 퇴근길을 함께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조금 가까워진 듯한 그들은 사사로운 얘기로 열을 올렸다.
"그럼 수화씨는 머리를 안 감아요?"
"안 감는 날도 있는 거죠!"
"네?! 여름에는 더워서 매일 감아야죠! 정윤씨는요?"
"저는 땀이 많아서 하루에 두 번 샤워하면서 감아요"
"봐봐요. 수화씨가 안 씻는 거라고요."
"외국은 며칠씩 안 감기도 해요!"
살짝 언성이 높아진 수화의 모습에 정윤과 지혜가 말을 멈추고 빤히 바라보자 수화는 둘을 번갈아 보며 실체 없는 거슬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는 듯 동갑내기라고 여긴 지혜를 향해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봐봐! 갑자기 이렇게 보는 게 싫어요!"
정윤은 의아했고 과장은 그 나이대 친해진 동료들끼리의 대화라고 생각해 그저 웃었다. 수화는 카페를 나서며 그들에게서 앞서 걸었다. 그런 수화의 모습이 지혜는 신경이 쓰이는 듯 바라보았지만 따라가지 않고 정윤과 과장 옆에서 사무실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사무실에는 영업팀이 모두 출장을 나가 수화 혼자였다. 적적한 수화는 헤드폰으로 노래를 듣기도 하고 인터넷 쇼핑을 하기도 했다. 점심시간에 있었던 지적에 대한 마음은 가라앉았고, 정윤에게서 온 메시지에 얼른 답했다. 정윤이 요청할 것이 있어 따로 메신저를 통해 연락을 한 것이다. 수화는 지루하던 차 정윤의 연락에 혼자 알고 있기에는 아까웠던 이야기를 펼쳤다. 자신의 PC의 인수인계 폴더에 있던 내용이었다.
"근데 정윤씨, 왜 정윤씨가 그 일을 해요?"
"원래 지혜씨 업무인 거 같던데"
"네?"
"제가 파일 뒤져봤는데 전에는 지혜씨 자리에 있던 사람이 했더라고요."
"지금은 업무가 다르게 분장되었어요."
"이걸 다 정윤씨가 해요?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어요."
"ㅎㅎ"
정윤은 그런 수화에게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며칠간 수화의 행동이 마음에 남아 거리를 지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정윤의 마음도 모른 채 수화는 후련해 보였다.
"오늘 같이 가요!"
"그래요"
수화는 정윤과 대화를 마무리하며 퇴근길에 함께 할 것을 전했다. 정윤은 근무하는 사무실이 달라져 건물 앞에서 인사만 나누는 것이 전부라 의아하긴 했지만 먼저 가도 된다거나 굳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지는 않았다.
수화는 정윤과 얘기하면서 지혜와도 역시 메신저로 업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화는 자신이 담당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불편해했다.
"이건 그 직원들이 직접 가야 하지 않아요?"
"이걸 제가 해요?"
수화의 의견에 지혜는 당연한 업무라는 것을 인지시키며 답답해했다. 지혜는 수화가 어려워하는 것들을 세세히 알려주는 편이라 수화도 지혜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렇게 둘은 하나씩 주고받았다. 매뉴얼을 보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절차와 말을 걸기도 무서웠던 상사들보다는 지혜의 도움이 수화에게는 가장 필요했다.
수화의 이해득실이 형성되었다.
"수화씨!"
건물 앞에서 등지고 서 있는 수화를 발견하고 정윤이 어깨를 살짝 만지며 불렀다.
"안녕하세요!"
수화가 해맑게 돌아보며 정윤과 지혜에게 인사했다. 지혜는 아직은 퇴근길을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한 듯한 기색이 있었지만 어차피 앞으로 같이 할 팀원인만큼 받아들이려 했다.
"안녕히 가세요!"
정윤은 지혜, 수화와는 다른 길로 가야해 인사를 하고 떠났다. 지혜와 수화는 정류장으로 향하며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화는 감정적으로 얘기를 나누게 되는 지혜와 부쩍 가까워졌다고 느껴 자리 이동이 대표의 지시인 것 같다는 불만을 서슴없이 토로했다. 지혜는 수화가 여전히 자리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들으면서 대표의 지시가 정말 잘못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