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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 Nov 05. 2024

[단편소설] 훔친 자존감 #4

"수화씨는?"


사무실이 멀어지면서 정윤은 수화와 업무상 연결고리가 있는 지혜에게 수화의 점심 여부를 물었다. 지혜는 말을 걸기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매번 수화에게 사무실에서 나서는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런 지혜의 연락에 수화는 마음이 동요되었다. 언쟁이 있던 날에도 어김없이 점심을 챙기자 외딴섬처럼 느껴지는 자신을 챙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큰 의지가 되었다. 정작 지금 사무실의 직원들과는 교류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며 왠지 정윤과 지혜 사이에 있고 싶었다. 그들의 관계가 부러웠다.




점심시간은 어느새 이과장과 함께 하게 되었다. 은근한 견제 관계가 생긴 대리들보다 사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운 이과장의 선택이었다.


"저는 딱딱한 복숭아가 좋더라고요."


카페에서 한창 수다를 떨며 지혜가 맞은편에 앉은 정윤을 향해 웃어 보이며 얘기했다. 정윤 역시 지혜와 취향이 같아 맞장구치려던 때, 수화가 먼저 맞장구를 쳤다. 지혜의 시선과 질문이 정윤에게만 향하는 걸 느낀 수화가 얼른 대화를 가로챈 것이다.


"어! 저도요! 저도 복숭아 좋아해요."


'음..'

"나도 좋아하는데"


"그리고 또 뭐 좋아해요?"


정윤의 대답이 무색하게 수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차 지혜에게 질문을 했고 자연스럽게 지혜는 수화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정윤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커피만 마셨다.




점심시간이 끝나가자 이과장의 빠른 걸음을 선두로 정윤과 지혜가 사무실로 향하였다. 건물로 들어설 때쯤 수화와 인사를 나누려고 두리번거렸을 때는 이미 수화가 사라진 상태였다.


"수화씨 갔어?"

"그런가봐요"

"인사도 안 하고 그냥 가셨나?"



점심시간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앞서 멀어지는 정윤과 지혜를 보고 수화는 천천히 따라 걷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멀어지는 그들에게 인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투명인간이야.


오후에는 영업팀 직원 대부분이 출장을 나가 수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 헤드셋으로 노래를 듣기도 하고 할 일이 없을 때는 손님용 소파에 누워 자신의 시간을 가졌다. 자유로운 것은 좋았지만 같이 즐길 사람 없는 것이 외로워 관리팀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기도 했다.


잠시 책상 정리를 하고 있던 수화는 사무실로 들어오는 지혜를 발견했다.  놀고 있는 모습을 들키면 안 될 것만 같아 괜스레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며 바쁜 척 타자를 쳤다. 그 모습을 본 지혜는 과한 수화의 행동이 연기라는 것을 느꼈지만 필요한 물건만 수화에게 받아 관리팀으로 돌아갔다.


"제가 갔더니 갑자기 일하는 척을 하시더라고요?"

"하하하"


관리팀으로 돌아간 지혜는 복도에서 마주친 정윤에게 상황을 전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 정윤은 수화에게 메신저로 업무 얘기를 마무리하며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얘기를 전했다. 이어 수화는 병원에 들를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다는 뜻을 전했다. 수화가 있는 사무실은 2층이라 퇴근시간에 바로 움직이면 정윤과 지혜가 밖으로 나오는 것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어 퇴근할 때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정윤은 치료를 잘 받으라는 이야기를 건네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정윤과 지혜는 평소와 같이 사무실을 나섰다.


"어, 수화씨네?"


아직 건물 앞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화를 발견하고 정윤이 얘기하며 지혜와 다가갔다.


"수화씨, 먼저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먼저 가요! 왜 여기 있어요!"


지혜의 호통치는 듯한 말투에 정윤은 짐짓 당황했고 수화 역시 어쩔 줄 몰라했다. 사정을 모르는 지혜는 출근 때마다 자신을 기다리는 듯한 수화가 오늘도 기다린 것이라고 생각해 저도 모르게 세게 말이 나간 것이었다.


가는 길이 다른 정윤을 보내고 지혜와 수화는 결국 같은 길로 걷게 되었다. 지혜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거 같아 수화는 괜스레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지혜는 정윤은 그렇지 않다라거나 정윤도 모를 것이다라는 온통 정윤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런 지혜의 대답에 수화는 묘한 마음이 들었다. 정윤을 정답처럼 얘기하는 지혜의 애정에 뒤틀린 마음이 들어 정윤에 대한 시기와 경쟁심이 피어올랐다. 수화는 정윤에게와 달리 자신에게는 공격적인 말투로 대하는 지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정윤과의 틈을 파고들었다. 지혜가 스스로 관계를 의심할 수 있도록 계속 질문을 던졌다.


"지혜씨는 왜 그렇게 정윤씨, 정윤씨해요?"

"정윤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혜씨는 정윤씨랑 동료인데 왜 아랫사람처럼 굴어요?"


"..... 네?"

"수화씨가 뭔데 그런 말을 해요?"


"아.. 아니.. 죄송해요..."


지혜의 날카로운 시선과 차가운 목소리에 수화는 훌쩍이며 눈물을 흘렸다. 지혜는 수화가 눈물을 닦아내는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기분이 나빴던 것은 사실이라 그녀를 달래주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 흐르는 땀 사이로 차가운 공기만 맴돌았고 둘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온 수화는 계속 지혜가 마음에 걸렸다. 지혜와 이대로 틀어질까 불안해 늦은 밤 괜히 밀린 청소를 하고 친구에게 연락해 상황을 전달했다. 자세한 상황을 알 턱이 없는 친구는 괜찮을 거라 다독였다. 친구의 위로에도 지혜 생각에 매몰되어 아침 출근길에 지혜를 만나 어떻게 자신을 대하는지 동태를 보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지었다. 지혜가 여린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수화였기에 애처로운 모습을 보인다면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화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수화는 분주하게 길을 나섰다. 지혜보다 먼저 정류장에 도착해 지혜를 기다릴 참이었다. 쇄골을 넘기는 머리를 미처 말리지 못하고 지하철에 몸을 싣었다. 지혜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 계속 불안한 마음이 수화를 짓눌렀다. 미안함 보다는 지혜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어서였다.

정류장에서 몇 대의 버스를 보내며 지혜를 기다렸다. 이제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설마 이보다 일찍 가지는 않았겠지. 정류장으로 오는 지혜를 보았다. 지혜도 수화와 눈이 마주쳤다. 불편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수화가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눈썹을 내리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수화에게는 아주 쉬운 행동이었다. 친구에게 불쌍해 보이는 연기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


지혜는 수화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화가 났고 자신이 좋아하고 따르는 동료와의 관계를 위아래로 바라본 수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측은지심이 가득해 때로는 손해를 보던 지혜인지라 수화의 모습을 이대로 모른 척하기에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미워하는 것도 자신의 에너지를 깎아 먹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너와 정윤은 다르다는 것을. 이때부터였을까, 수화의 말 하나하나에 정윤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 수화의 위축된 모습에 지혜는 그녀가 반성을 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은 수화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그 시작점도 잊은 채 수화에게 동요되어가고 있었다.




지혜는 여느 때와 달리 사무실을 나서며 수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성적으로 수화에게 점심시간을 알리게 된 지혜가 마지못해 수화에게 사무실을 나선다는 전화를 건 것이다. 수화가 받기 전 얼른 끊고는 정윤, 이과장과 건물 밖으로 향했다. 수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혜에게 연락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지혜의 전화에 수화는 아직 자신을 챙기는 듯한 그녀의 행동이 의아했다. 몇 시간 전 출근길 지혜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행동이었다. 관리팀 사무실에서 지혜의 역할을 알리가 없는 수화였기에 지혜의 행동이 자신에 대한 관심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은 내려앉은 분위기로 어색하게 흘러갔다. 정윤은 침체되어 있는 수화와 정윤의 모습에 둘이 무슨 일이 있었나 추측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둘이 해결할 문제겠지. 과장 역시 별다른 낌새는 채지 못하고 넷은 필요한 몇 마디만 나눈 채 점심시간을 보냈다.




지혜는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업무에만 집중했다. 수화에 대한 찝찝한 마음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흘려보내기로 했다.


'영업팀 다녀올게요'


지혜는 팀장이 요청한 업무가 있어 정윤에게 채팅 메시지를 남겼다. 사무실 자리를 비울 때마다 정윤과 지혜는 서로에게 행방을 알렸다. 정윤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스트레스가 되어 그녀와의 관계를 놓아 버리기 전까지는 당연한 둘의 패턴이었다. 의심으로 점철되고, 인지적 편견으로 왜곡 수집된 증거는 확신이 되어 그 관계를 변화시켰다.




지혜가 영업팀 사무실로 들어서려던 차, 안에서는 큰 소리가 들렸다. 영업팀 직원 누군가 서류를 흔들다 책상으로 던졌고 그 서류들이 흩날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화는 그 종이 두어 장을 줍고 있었다. 영업팀 직원은 그대로 자리를 떴다. 자신의 분에 갇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인 듯했다. 수화는 서류를 가지런히 하기 위해 책상에 탁탁 내려치고는 파일에 넣으려다 지혜와 눈이 마주쳤다.


"어.. 무슨 일이에요?"


"팀장님이 확인 요청한 것도 있고 빌려갈 것도 있어서요."


"아.. 네.. 어떤 거죠?"


지혜는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그저 업무 이야기만 나누었다. 수화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한 물건을 찾아 건네주면서도 한껏 가라앉은 상태였다. 점심시간까지 있었던 둘 사이의 일들은 희미해졌다. 지혜가 사무실로 돌아가려 하자 수화가 따라나섰다. 때마침 나타난 지혜가 위로가 되었다.


"저기 앞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 괜찮아요?"


"흐으으윽"


수화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수화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지혜뿐이었다. 소리 내 우는 수화를 데리고 잠시 회사 옆 작은 카페로 향했다.


"뭐 마실래요?"


"아무거나요.."


지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구석진 자리에 움츠리고 앉아 있는 수화에게 다가갔다. 조용히 커피를 받아 들고 수화는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진정된 듯 보였다.


"고마워요"


"무슨 일이에요?"


수화는 영업팀 직원들이 꽤나 거칠고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눈앞에서 그런 광경을 본 지혜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수화가 입사 후 너무 사소한 질문들까지 하나하나 할 때면 귀찮거나 심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아까 본 그녀의 기죽은 모습이 그 생각들을 덮게 하였다.

자리로 돌아온 수화는 후련했다. 걱정했던 지혜와의 관계가 영업팀 직원의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가까워진 듯 해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어진 상태였다. 지혜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무기가 생겼다는 수화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정윤과 지혜는 같이 사무실을 나섰다. 정윤과 지혜는 집으로 바로 가는지, 저녁은 무얼 먹을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물 밖에는 어김없이 수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화는 웃으며 정윤과 인사를 했고 정윤 역시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향했다. 지혜와 둘이 남은 수화의 얼굴은 차분한 듯 어두웠다. 아직 기죽은 듯 보이는 수화의 모습에 지혜는 영업팀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며 마음이 불편했다.


"집으로 바로 가요?"

"근처에서 맥주 한잔하고 갈래요?"

"치맥 먹고 싶은데.."


수화가 말문을 트며 지혜에게 치맥 제안을 했다. 지혜는 수화가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한 동료로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윤씨 얼마 안 갔을 텐데 그럼 같이 먹을까요?"


지혜가 정윤에게 전화를 걸려하자 수화는 얼른 그녀의 팔을 잡으며 거절했다. 오후에 있었던 일을 정윤에게까지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지혜는 수화의 마음을 되묻기 어려웠다. 지혜가 보기에 수화는 피해자였고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밤바람은 시원해 야외에서 맥주를 마시기에 마침이었다. 근처 치킨가게로 들어가 야외 테라스에서 맥주와 치킨을 주문했다. 수화가 맛있다고 한 메뉴가 있는 반반치킨을 주문했다. 수화는 살짝 들떠 보였다.


"지혜씨는 집에 가면 뭐해요?"

"남자친구 없어요?"

"외롭지 않아요?"

"저는 너무 외로워요.."


수화는 맥주를 마시며 지혜와 빈틈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혜 역시 남자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시기라 수화에게 공감하며 외롭다는 이야기를 했다. 수화가 회사 일보다 사적인 이야기로 열을 올려 지혜의 의도와는 다른 자리가 되었지만 지루할새 없이 그 시간에 집중하였다. 지혜는 최근에 했던 소개팅 이야기를 하며 상대와는 친구로 지내기로 했으니 관심 있으면 그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이야기했다.


"뭐하는 사람이에요?"


"치과의사예요"


"좋아요..!"


세 시간쯤 지났을까 지혜는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수화는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세 시간이 지혜와 세 뼘만큼 가까워진 듯 마음에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출근길 환승 구간에서 수화는 지혜를 기다렸다. 밝은 얼굴로 수화는 인사했고 지혜도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지혜가 소개해주기로 한 남자와의 만날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고 잘되었으면 좋겠다며 화기애애하게 사무실로 향했다.


"조금 있다 봐요!"


수화는 손을 들어 인사하고 영업팀 사무실로 향했다. 영업팀과 출근시간이 달라 수화가 늘 사무실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수화는 빈 사무실에서 고데기로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수화는 사무실에 고데기며 화장품과 각종 개인 소지품을 챙겨 두었다. 그럴 때면 이 사무실에 있는 것이 꽤나 좋다고 생각했다. 관리팀 상사들이 자신을 찾을 때도 대면이 아니라 메신저나 전화로 소통하다 보니 같은 사무실에 있는 것보다 편하다 느끼기도 했다. 외로운 것이 단점이었으나 이제 그것도 해결될 것만 같았다.




여느 때와 같이 이과장, 수화, 지혜, 정윤이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나란히 서서 걷고 있는 세명의 뒤로 따라가던 수화가 지혜의 옷깃을 살짝 잡고 당겼다. 수화의 당기는 손짓에 지혜는 영문도 모른 체 뒤에 있는 수화의 옆으로 가 섰다. 움직임이 느껴지던 그 순간 이과장과 정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음?'





#피해자코스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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