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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 Nov 12. 2024

[단편소설] 훔친 자존감 #5

'나'를 위한 '우리'


점심을 먹고 영업팀 사무실로 돌아간 수화는 오늘도 혼자였다. 이제는 혼자인 사무실이 익숙해져 밖으로 다시 나가 좀 더 쉬기도 했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오늘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동료가 소개팅을 해주기로 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입사 때부터 지혜에 대한 얘기를 시시콜콜했던 터라 수화의 친구는 의외다라는 반응을 했다.


"걔 별로라고 하지 않았어?"


"이제 안그래, 순진하더라고"

"과장님이 또 일 시켜. 카톡 할게!"


수화를 지켜본 영업팀 사무실에서는 그녀의 출퇴근 시간에 대한 볼멘소리가 돌았고, 직원들이 오고 가며 본 사무실에서의 행동에 대해 관리팀 팀장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팀장이 들은 이야기는 이과장에게 전달되었다. 영업팀 팀장은 수화의 출퇴근 시간 조정을 원했고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한 구체적인 선을 알려달라 요구했다. 수화가 영업팀 팀원들과 출퇴근 시간을 맞추어야 협력이 수월하다는 것과 업무 요청을 할 때면 자신의 업무가 아니다는 태도가 그들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관리팀 팀장의 지시로 이과장은 수화에게 메신저로 업무를 주며 관리하기 시작했다. 수화에게 답이 없을 때면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자리에 있는지 확인했으며 받지 않을 때는 다시 메신저로 그녀의 위치를 물었다. 수화는 이과장의 간섭이 거슬렸고 그녀에 대한 불만이 늘었다.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행동들이 누군가 자신이 누리는 자유에 대해 고자질한 것이라 추측했다.




퇴근 전 수화는 고데기로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고쳤다. 오늘이 그 치과의사와의 소개팅날이었다. 지혜에게 번호를 넘겨받아 약속 장소를 정했다. 짧게 주고받은 메시지가 다였지만 수화는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는 생각에 들떴다. 퇴근길, 정윤을 보내고 수화는 지혜에게 떨리는 마음을 쏟아냈다. 그런 수화에게 지혜도 소개팅이 생겨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수화는 남자친구를 만드는 것이 삶의 낙이라 여겼고 지혜 역시 그런 의미일 것이라 생각해 잘되길 바란다며 의지를 다졌다.


"우리 이번에 꼭 남자친구 만들어요!"


수화의 소개팅 장소에는 상대가 먼저 나와있었다. 직업뿐 아니라 외형도 수화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어쩐지 피곤해 보였다. 일이 바빠서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식사 후 가보겠다는 말과 함께 수화의 귀갓길을 묻지 않음으로써 본인의 의사를 밝혔다. 수화는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친구들에게 소개팅 상황을 전달했고 수화가 안타까웠던 친구들이 주말에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수화는 애써 외로움을 삼켰다.

불 꺼진 집에 도착한 수화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헤어진 남자친구의 짐을 마저 정리했다. 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입구에 밀어두었다. 어떻게 전해줄지 고민이던 차에 헤어진 남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와 만날 날을 정했었다. 짐을 주기 위한 마지막 만남이라 굳게 마음먹었다.

'내일 온댔지'




소개팅에서 별 소득이 없었고 헤어졌던 남자친구와의 약속도 있는 날이라 수화의 마음 한 켠에는 서늘한 기운만 가득했다. 사무실에 가방을 두고 회사 앞의 카페로 커피를 사러 갔다. 출근 알림을 하듯 이과장에게서 연신 카톡이 왔다.


'수화씨, 좋은 아침이에요. 어제 준 자료 그래프 다 만들었어요?'

'만든 거 지금 보내줄래요?'

'그리고 내가 메일로 보냈는데 그 파일도 정리해줘요.'


'좋은 아침입니다. 과장님, 그래프 아직 덜 만들었는데 오늘까지 만들어드리면 될까요?'


수화의 답장에 이과장은 전화를 걸어 어디냐고 물었고 자료가 어디까지 완성되었냐며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꾸짖었다. 이과장의 날 선 말투에 수화는 위축되면서도 그게 그렇게 중요한 자료인지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름 순화하여 이과장에게 오늘 꼭 필요한 자료인지 물었다. 이과장은 화가 솟구쳤다. 자신이 불필요한 지시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과 수화의 업무 태만에 대해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수화씨! 자료 오전까지 주시고, 메일 확인 바로 해줘요."


"네, 알겠습니다."


수화는 사무실에 들어가 카페에서 사 온 음료를 마시며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다 망쳐진 기분이었다. 지혜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지혜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탓에 아침에 수화를 만나지 못했다. 수화는 어제 있었던 소개팅에 대해 애프터는 받지 못했다고 얘기했다. 지혜는 수화가 거절당한 것 같아 별다른 반응을 해주지 못했다. 대신 자신이 했던 소개팅도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며 점심 메뉴로 말을 돌렸다.


'오늘 점심 뭐 먹을래요?'


'저는 오늘 따로 먹고 싶어요..'


'네? 왜요?'


수화는 아침부터 있었던 이과장과의 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사무실이라 점심시간을 같이 보내지 않으면 관리팀 직원들은 내내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따로 먹고 싶어진 결정적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지혜 역시 수화가 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몇 번 언급한 적 있기에 이과장에게 혼난 것을 얘기해봤자 자신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라 생각해 담아뒀던 다른 얘기를 꺼내었다.


'이과장님이 저를 안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네? 에이~'


'진짜예요.'

'이과장님 정윤씨가 먹자고 한 메뉴는 바로 먹으면서 제가 얘기한 거는 안 먹었어요.'

'이과장님은 정윤씨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에이.. 뭐 그런걸로'

'같이 먹어요~! 뭐 먹고 싶은데요?'


지혜는 수화를 설득해 점심시간에 함께 하기로 했다. 수화의 상황을 몰랐던 지혜는 그저 그녀가 먹고 싶은 메뉴를 같이 먹으면 수화의 마음이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정윤과 지혜, 이과장이 일층으로 내려갔다. 수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윤은 손인사를 했고, 지혜는 눈짓만 했다. 이과장을 따라 정윤과 지혜가 그 옆에 나란히 서서 수화를 앞서 걷던 찰나, 수화가 지혜의 소매를 당겼다. 그녀를 뒤에 있는 자신의 옆에 서게 했다. 정윤은 옆에 있던 지혜가 움직이자 뒤돌아보았고 수화와 눈이 잠시 마주치고 앞을 보았다. 수화의 행동이 정윤은 미묘하게 거슬렸지만 회사에서 쓸데없는 감정낭비를 꺼려했던 터라 내버려 두기로 했다.


"수화씨가 당겼죠!"


그녀가 당긴 손길에 뒤에 서게 된 정윤이 큰 소리로 얘기했다. 수화는 반응하지 않았고 그대로 식당으로 향했다. 수화는 지혜의 옆자리로 얼른 가 앉았다. 지혜의 맞은편에 정윤이 앉고, 그 옆에 이과장이 앉은 채로 식사를 했다. 이과장에게 기분이 상한 수화는 점심시간 내내 침묵을 지켰다. 정윤 역시 찝찝한 마음에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이과장과 지혜 역시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넷은 조용히 일어나 관성적으로 카페로 향했다. 저렴한 가격에 맛까지 있어 점심시간마다 붐비는 곳이었다. 각자 커피를 주문하고 계산 후 자리에 앉았다. 지혜는 침묵을 깨고 먼저 말문을 텄다.


"수화씨 주말에 뭐해요?"


"친구 만나요"


"어디에서요?"


"해방촌 가기로 했어요."


"우와! 재밌겠다. 나도 갈래요!"


"네..?"


"나도 같이 놀래요! 같이 놀면 안돼요?"


수화는 지혜의 얘기가 진심인지 장난인지 파악하기 애매했지만 장난이더라도 수긍하면 진짜 올 것만 같아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고 입을 닫았다. 지혜는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수화와 친밀감도 있으니 농담 삼아 지루한 주말에 함께 놀고 싶다는 말을 던졌다. 깊은 유대관계를 원한 것은 아니고 지혜의 말 그대로 '노는 것'이 전부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수화는 회사에서만 외롭지 않게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뿐 그 외의 영역에 그녀를 끌어들이는 것에 한발 뒤로 뺐다.


이과장은 시계를 보더니 말없이 일어섰다.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정윤과 지혜, 수화가 이과장을 따라 카페를 나섰다. 사무실이 다른 수화와 헤어질 구간이 오자 지혜가 그녀에게 다시 한번 외쳤다.


"주말에 저도 갈게요!"

"가요 저?!"


정윤은 지혜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다 수화와 눈이 마주쳤다. 수화 역시 정윤과 눈이 마주치고 짐짓 머뭇대다 멀어지는 지혜에게 외쳤다.


"와요. 와!"


직접적으로 거절하기에는 자신의 속마음이 들켜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까 불안했고 수긍하기에는 불편했다. 수화는 카페에서 지혜에게 답하지 않음으로 거절의 뜻을 밝혔지만 짓궂게 묻는 지혜에 대한 반발심으로 오라고 소리쳤다. 설마 진짜 오진 않겠지.




퇴근길 수화를 만난 지혜는 가볍게 눈인사 후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수화는 점심때 거절한 이유로 자신을 멀리하는 거 같은 지혜를 얼른 쫓았다.


"뭐 먹고 갈래요?"


"가야돼요."


"치맥 먹고 갈래요?"


"저 가야 된다니까요."


수화는 잰걸음으로 지혜를 계속 쫓았다. 이대로 다시 지혜가 멀어질 거 같아 불안감이 올라왔다. 지혜는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은 줄 알았던 수화가 미심쩍어져 원래대로 거리를 두려 했다.


"..."


수화가 말없이 잰걸음으로 계속 쫓아오자 지혜는 불편해져 다시 말을 걸었다.


"오늘 병원 가야 돼요."


"..!"

"어딘데요?"


"왜요."


"..."


"정류장 지나서예요."


"데려다 줄게요!"


"수화씨가 왜 데려다줘요."


".."


수화는 말없이 지혜의 병원까지 동행했다. 지혜는 따라오는 수화를 보고 의아했지만 외면한 채 병원으로 들어섰다. 병원에 들어서며 지혜는 수화에게 손짓하며 이만 가라고 했고 수화는 그제야 자리를 떴다.




수화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피로가 몰려왔다. 가방을 소파에 던지고 침대로 가 그대로 누웠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헤어진 남자친구였다. 오늘 만나기로 한 날이라 수화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는 연락이었다. 수화는 옷은 그대로 입은 채 화장만 고치고 내려갔다. 그는 수화의 화장한 모습이 예쁘다고 하기도 했고 헤어졌지만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에게 미련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면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았다.


차에서 그는 기다리고 있었고 수화를 보고도 내리지 않았다. 수화는 여느 때처럼 조수석으로 가서 탔다. 그는 잘 지냈냐며 안부인사를 건넸고 보고싶었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마음을 굳게 먹은 터라 수화는 고개를 저었다. 시험공부를 하던 그를 흔히 말하는 뒷바라지를 하며 도왔지만 합격한 남자친구가 여타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수화에게 이별을 고했었다. 발령 전 기간이 꽤 되어 여행을 다녀온 그가 수화를 찾아온 것이다.

그의 보고싶었다는 말이 그저 오늘 같이 있고 싶다는 얘기라는 것을 수화는 느끼고 있었다.


"짐 싸놨어. 가져가."


수화는 차에서 내렸고 그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침묵만 감돌았다. 수화가 살고 있는 층에 다달았을 때 문 앞에 상자가 놓여있었다. 그가 들고 갈 짐이었다. 그와 그렇게 완전히 끝냈다.

불 꺼진 방이 쓸쓸해 불을 켜놓고 나갔었는데 그대로 수화는 침대에 누웠다. 마음 둘 데 없는 지금, 누구의 관심이라도 필요했다. 다행히 내일은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어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늦은 오후, 수화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해방촌으로 갔다. 남자친구와 지내는 동안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친구들을 만나며 외로운 시간을 채웠다. 수화와 친구들이 있는 술집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만남을 가지는 테이블이 보이자 수화 역시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앞다투어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고 수화와 친구들은 택시를 타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한창 흥이 올라있는 이태원 펍으로 갔다. 절로 리듬이 타지는 음악소리에 수화는 흥이 났고 친구들과 몸을 움직였다. 사람들이 주위로 오고가며 관심을 표하는 것을 보고 수화와 친구들도 눈짓으로 둘러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남자는 없었다.

오랜만에 얼큰하게 취한 수화는 몸을 비틀거리며 친구들에게 가기 싫다고 했지만 친구들은 택시를 불러 수화를 태워보냈다. 집으로 돌아 온 수화는 씻을 정신도 없이 침대에 몸을 뉘였다. 남자친구의 빈 자리를 친구로라도 채울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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