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도 밖의 세계
병원을 나서는 지성의 손에 들린 처방전은 '인생의 불량 판정서'였다.
‘불안장애 및 공황발작’.
지성은 그 글자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생님, 이건 오진입니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수조 원대 프로젝트의 하중을 계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고작 내 머릿속의 전기 신호 하나 통제 못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성은 품위를 유지하려 했지만, 셔츠 깃 너머로 배어 나온 식은땀이 그의 자존심을 적셨다.
의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덧붙였다.
“환자분, 건물도 하중을 견디다 못하면 미세한 균열부터 시작해 결국 무너집니다. 지금 환자분은 '내 건물은 튼튼하니 무너질 리 없다'고 외치며 붕괴하는 잔해 속에 서 계신 거예요. 당분간 모든 수치를 잊으세요.”
딸깍—
운전석에 앉아 차 문을 잠갔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가지?’
핸들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평생 자신의 인생을 완벽하게 설계해 왔다고 자부했는데, 정작 자신의 뇌가 내린 ‘파산 선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지성에게 이것은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다.
완벽한 남편, 유능한 아빠라는 성채가 허물어지는 꼴을 보일 순 없었다.
그는 몸이 기억하는 유일한 도망처—충남 서산의 낡은 생가로 향했다.
서산의 생가는 지성이 설계한 빌딩들과는 정반대의 언어를 쓰고 있었다.
대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끼이익— 하는 비명 소리부터 지성의 신경을 긁었다.
경첩은 녹슬어 삐딱했고, 문틀은 기묘하게 일그러진 마름모꼴에 가까웠다.
서울의 사무실이었다면 당장 부수라고 불호령을 내렸을 ‘무질서의 극치’.
그런데 이상했다.
습한 흙내음과 오래된 나무의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어오자, 델 듯이 뜨겁던 지성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그는 마당 한구석, 녹슨 대문 옆에 놓인 낡은 평상에 몸을 뉘었다.
한쪽 다리가 짧아 넓적한 돌멩이를 괴어놓은 ‘불량품’이었다.
덜컹—
몸을 뒤척일 때마다 평상이 기우뚱거렸다.
수평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안정한 박자.
그런데 그 삐딱한 흔들림 위에서, 지성은 처음으로 굳게 닫혀 있던 숨통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0.1mm의 오차도 없는 명품 침대 위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방임의 안도감'이었다.
어쩌면 인간은 원래 이렇게 비뚤어지고 흔들리는 존재가 아닐까.
지성은 스스로를 90도의 직각 속에 가두려 했기에 병이 들었던 것이다.
이 낡은 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은 설계도가 아니라 흙과 바람으로 빚어진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지성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그곳엔 거대한 무질서가 펼쳐져 있었다. 별들은 수열에 맞춰 서 있지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지도 않았다.
어떤 별은 유난히 밝고, 어떤 별은 희미하게 명멸하며 제멋대로 밤하늘이라는 도면 위에 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질서한 흩뿌려짐이 모여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자를 대고 그은 직선보다, 제멋대로 반짝이는 별들의 곡선이 훨씬 더 완벽한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있었다.
‘아... 아름답다.’
지성은 처음으로 인정했다.
별들이 저토록 무질서하게 떠 있어도 우주가 무너지지 않듯, 자신의 인생도 조금 비뚤어지고 흔들린다고 해서 끝장나는 게 아님을.
창조주가 만든 저 거대한 도면 안에는 '완벽' 대신 '조화'가, '통제' 대신 '흐름'이 흐르고 있었다.
...
지성은 삐딱한 평상 위에서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
낡은 평상의 삐걱거림이 마치 요람의 흔들림처럼 느껴졌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무너짐’을 인정하며, 밤하늘의 무수한 별빛 아래서 소리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90도라는 감옥에서 풀려난 한 인간이 비로소 마주한, 가장 정직한 생의 호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