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불안을 지우는 실재의 감각
창고 안은 미세한 톱밥 가루로 가득했다.
지성은 며칠째 그 먼지 구덩이 속에 자신을 가둬두고 있었다.
이장이 부탁한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아이’를 위한 흔들의자.
하지만 정작 깎이고 깎여 나가는 것은 지성 자신이었다.
사각— 사각—
대패질을 할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날 선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건축가야, 목수 시늉이나 하고.’
‘무너진 자존심을 나무판자로 덧대려는 수작이지.’
지성은 그 환청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이 화끈거릴 정도로 대패를 밀었다.
나무 향이 비릿하게 코끝을 찔렀고, 근육의 비명만이 그를 ‘지금 여기’에 붙들어 매고 있었다.
그때, 창고 입구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성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서울의 먼지를 그대로 묻히고 내려온 아내와 연우가 서 있었다.
아내의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는 이곳의 눅눅한 공기와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의 깨끗한 구두 끝에 톱밥 가루가 닿자, 지성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더러워진 손을 뒤로 감췄다.
“...여보.”
지성이 먼저 입을 뗐지만, 돌아온 것은 서늘한 침묵이었다.
아내는 먼지 자욱한 창고 안과, 며칠간 씻지도 못한 채 앉아있는 남편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거야? 당신이 내팽개치고 간 그 수많은 현장과 클라이언트들, 내가 어떻게 수습하며 버텼는지 알기나 해?”
“여보,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당신이 연락 끊고 잠적한 뒤로, 사무소 파트너들이랑 소송하니 마니 하루가 멀다고 전화 오고... 당신이 '천재' 소리 들으며 쌓아온 평판이 하루아침에 쓰레기통에 박히는 걸 지켜보면서 내가 연우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 것 같아? 당신은 여기서 고상하게 ‘나무’나 만지면 그만이지만, 남겨진 우리는 당신이 던져놓은 오물들을 다 뒤집어쓰고 있었어. 당신 지금 회복하는 거 아냐. 그냥 비겁하게 숨은 거지.”
아내의 목소리가 창고 벽에 부딪혀 날카롭게 튀어 올랐다.
지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의 말은 토씨 하나 틀린 게 없었다.
그는 세련된 수트와 성공이라는 가면이 깨지자마자, 그것을 수습해야 할 이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이곳으로 도망쳐온 것이었다.
지성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이 만들던 기괴하게 뒤틀린 의자 다리를 만졌다.
“...맞아, 여보. 미안해. 내가 너무 높이만 지으려고 했어. 당신이 서울에서 그 무거운 천장을 혼자 받치고 있을 때, 나는 내 자존심 무너진 것만 아파하느라 당신 비명 소리를 못 들었어. 이제야... 당신 신발에 묻은 흙이 보여. 내가 낮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이 보여.”
아내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분노라는 성벽이 허물어지고 그 틈으로 참았던 눈물이 새어 나왔다.
지성은 떨리는 손을 뻗어 아내의 옷소매에 묻은 톱밥 가루를 털어주었다.
완벽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아내의 슬픔과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맞추는 순간이었다.
연우는 아빠의 거친 손을 잡았다.
빳빳한 교복을 입은 아이의 차가운 손과 톱밥 가루 묻은 아빠의 뜨거운 손이 만났다.
지성은 깨달았다.
자신의 무너짐은 실패가 아니라, 가족의 고통을 비로소 허락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내가 부서지고 나서야 그 갈라진 틈 사이로 아내의 눈물과 연우의 떨림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연우야, 여보... 내가 고장 나서 다행이야. 이제야 당신들 마음이 만져지거든.”
연우는 아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고, 아내는 조용히 다가와 지성의 더러워진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톱밥 먼지가 햇살을 받아 금가루처럼 날리는 창고 안에서, 세 사람은 서로의 틈새를 메우며 비로소 한 지점에 '접지'되었다.
◇ 접지(Grounding)
우리는 대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정작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며 살아갑니다. 머릿속에서 스스로 써 내려간 비극적인 시나리오에 갇혀 숨 가빠 하기도 하죠.
그럴 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거창한 논리가 아닙니다. 지금 내 손바닥에 닿는 나무의 촉감, 코끝을 스치는 나무 향, 내 발바닥을 지탱해 주는 단단한 바닥의 기운을 느끼는 것. 전문 용어로 '접지(Grounding)'라고 부르는 이 소박한 행위는 우리를 가짜 불안에서 끌어내 실재하는 평온으로 인도합니다.
완벽한 성벽을 쌓는 것이 가족을 지키는 길이라 믿었지만, 때로는 그 성벽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막는 방음벽이 되기도 합니다. 지성이 무너지고 나서야 딸의 눈물을 발견했듯이, 우리 삶에 생긴 균열은 실패가 아니라 비로소 타인의 아픔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