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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따비 Feb 09. 2017

여배우에 올인한 뮤지컬

뮤지컬 보디가드

오롯이 여주인공을 위한 뮤지컬은 흔치 않다. 특히 여성 관객이 지배적인 국내 시장에서 여성 주연배우를 전면으로 내세운 작품을 만나기란 하늘에 별따기에 가깝다. 이 장르에서 여성이 그려지는 전형적인 타입의 한계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공주이거나 신데렐라이거나 혹은 창녀다. 여성의 위치 짓기가 사회 문제로도 떠오르는 현시대에 이러한 플롯이 여전히 유효한 장르 중의 하나가 뮤지컬인 셈이다. (관객에 입장에선 하릴없이 '받아들인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그런 면에서 뮤지컬 <보디가드>는 참 신선했다. 휘트니 휴스턴의 명곡들을 짜깁기한 주크박스 뮤지컬임은 감안하더라도,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여길 보나 저길 보나 단 한 명의 배우, 여주인공 레이첼 마론이다. 조금 과장을 더해서 2시간 20분 내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레이첼뿐이라고 한다면 믿을까. 심지어 남자 주연배우(프랭크 파머)는 극 내용 상 피치 못할 사정으로 우스꽝스럽게 노래 한 곡을 뽑는 게 전부다. 앙상블의 비중은 노래보다 춤으로 표현되며, 그마저도 레이첼의 노래를 뒷받침하는 화음에 머무른다. 작품 전반이 그녀를 서포트하기 위해 동원된 모양새다. 무려 1992년 동명의 영화가 원작이지만 신선함만큼은 어느 뮤지컬에 못지않다. 물론 그 신선함이 마냥 긍정적일 런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 결과, <보디가드>는 느슨한 드라마를 덧입힌, 톱스타 레이첼의 콘서트가 되었다. 아니면 휘트니 휴스턴의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 같은 명칭도 괜찮겠다. 극의 힘은 사실상 무용해서 언급하기도 민망하다. 꽤 놀라울 정도로 '노래하는 레이첼'에게 올인했기 때문이다. 인터미션 때 영화 <보디가드>를 검색했다가 매우 높은 평점에 깜짝 놀랐는데, 그중에서도 "타이타닉에 못지않다"라는 감상평은 눈을 의심케 했다. 대체 영화를 뮤지컬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뮤지컬은 원작을 두고 제작되는 경우가 많아서 뮤지컬을 보고 나면 원작을 찾아보게 된다. 늘 그랬듯, 아니 이번엔 더더욱, 원작 영화가 지닌 명작 포인트가 궁금해졌다. 심지어 영화에서는 휘트니 휴스턴이 직접 생생하게 노래를 부르는 감동도 없었을 것 아닌가. (이것은 뮤지컬 <보디가드>의 유일한 강점이다.)


레이첼 마론 역의 손승연


관점을 좀 달리 해볼까. 'I Have Nothing', 'Greatest Love Of All', 'Run To You', 'One Moment In Time' 등 휘트니 휴스턴의 명곡들을 2시간 남짓 동안 생생한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기회다. 클라이언트와 사랑에 빠지는 보디가드, 그로 인한 직업윤리적인 내적 갈등, 팝스타 동생에게 가려진 언니의 외로움과 같은 뻔한 설정들, 그리고 스토커를 처치하는 순간들의 어설픈 연출들은 그저 적당한 눈요기로 만족하자. 대신 오랜 명곡들의 향연에 마음을 내어준다면 그걸로 됐을 공연이다. 필자가 관극했던 날의 레이첼 역은 손승연이었는데,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들을 연달아 소화할 수 있는 인물로서 국내 몇 안 되는 가수임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로맨스와 모성애를 동시에 보여줘야 하는 역할로서 배우 손승연은 아쉬움이 많다. 하지만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아껴두려 한다.


어쩌면 그런 불평들은 부질없는 것일 수도 있다. 연출자와 제작진들은 쿨하게 염두에 두지 않았을 지점이지 않을까. '하지 않은 것들',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비판하는 것보다 '해놓은 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생산적일 수 있다.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들, 음, 그 노래들. 그것이 전부이지만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공연 또한 분명 존재한다. 다만 나의 불평들은 주크박스 뮤지컬에 대한 그간의 아쉬움을 다시 반복한 경험이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레이첼 마론 역의 이은진(양파), 정선아, 손승연


결국 이 글의 결론은 서두의 '여주인공' 이야기와 다시 연결된다. 관극을 고민하고 있다면, 레이첼을 맡은 세 여배우들의 노래를 한 번씩이라도 들어보길. 뮤지컬 <보디가드>의 승패는 정말로 레이첼 역의 여배우, 그녀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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