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드 파리, 'Belle'
지난 일요일, 우연히 TV에 흘러나오던 <열린음악회>에 시선이 머물렀다. 현재 공연중인 '노트르담 드 파리' 배우들이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작년의 관극 이후 잊고 지낸 지 일 년 정도 흘렀을까. 우연이든 필연이든 어디선가 이렇게 꼭 다시 마주치고 만다. 그리고 다시금 꺼내 들을 때마다 마음은 한동안 노래에 머무르곤 했다. 가사 하나하나가, 짧은 음절과 그 음절이 모인 선율들이, 노래에 실린 배우들의 감정들이 귓가에 인상을 남기고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몇 년 전 뮤지컬에 관심이 있다는 내게 누군가가 퉁명스럽게 물은 적이 있다. 뮤지컬은 그냥 말로 하면 될 거 왜 굳이 노래로 표현하느냐고. "슬퍼", "너를 사랑해.", "짜증 나." 이렇게 간단한 단어들을 내뱉으면 그만인데. 그 당시 대답할 준비가 안 된 나는 머뭇거렸다. 뮤지컬을 좋아하면서도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던 질문이었다. 만약 그 대답을 지금 다시 하게 된다면, 나는 이 노래를 들이밀고 싶다. 이 한 곡은 충분한 답이 되어줄 것이다. 그 이유가 분명하게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부끄러운 대답만은 아닐 것 같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표곡 중 하나인 'Belle'은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는 세 남자의 세레나데다. 제목은 '아름답다'는 뜻이다. 무엇이 아름다울까. 일단 사랑의 대상인 에스메랄다일 확률이 크다. 세 남자는 모두 'Belle'이라는 단어와 함께 자신의 파트를 시작한다. 콰지모도에게 'Belle'은 "눈부신 그녀를 위해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다음 프롤로의 노래를 들으면 조금 의아해진다. "천하고 더러운 한 여자"란다. 대성당의 주교의 눈에 집시 여인의 아름다움이 곧이곧대로 보일 리 없다. 뒤이어 페뷔스는 약혼녀에게 용서를 구하며 에스메랄다야말로 "내가 원하는 사랑"이라 한다. 아름다운 것은 단지 그녀의 외모만이 아닐지 모른다. 다시 가사 전반을 곱씹어본다. 세 남자들은 저마다 에스메랄다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고 있다.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원죄를 안겨주는 사랑, 고결한 언약을 저버리게 하는 사랑. 모양새는 다르지만 이들이 노래하는 사랑은 곧 죄악이요, 저 여인은 죄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세 남자의 입술에서 간절하게 읊조려지는 'Belle'은 사실 마치 기도문의 첫 구절처럼 그들의 바람을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기를.
(콰지모도) Belle 눈부신 그녀를 위해 있는 말 새처럼 날개짓하는 그녀를
아름다운 그녀를 바라볼 때면 난 마치 지옥을 걷고 있는 기분
제목 하나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는 여지는 이 노래 특유의 매력과도 맞닿아 있다. 그 상황을 무어라 하나로 명료하게 정의 내리긴 어렵지만, 어쨌거나 이 세 남자들은 참 비장하고 절박하다. 이 노래의 훌륭한 점을 단 한 가지 꼽는다면, 그 감정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그러나 최선의 정도로 가늠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이다. 한 명도 두 명도 아닌 세 명의 사랑들이 한 곡 안에서 제 절박함을 울부짖고 있다. 저마다 사연은 또 어찌나 벼랑 끝에 서 있는지. 동일한 멜로디 위에 차례대로 얹히는 고백은 한 여인을 향한 강한 욕망이라는 점에서 닮았지만 그 구체적인 결들은 사뭇 달라서 듣는 이로 하여금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엇물리고 엇갈린 사랑들의 최종 결말은 무엇일까. 사랑이 좌초되기 전 사랑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와 이뤄지지 않을, 최소한 두 명의 남자는 필연적으로 비극을 맞이할 것이다. 비극의 깊이를 가늠해볼 수 있을까. 노래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세 남자가 울부짖듯 노래할 때 전해받는 먹먹한 감정이 있다. 적어도 그보다야 깊을 것이다. 이 노래는 감히 그렇게 예감하게 한다.
(프롤로) Belle 너를 사로잡고 있는 악마가 신을 향한 내 눈을 가리는가
너로 인해 눈을 뜬 욕망에 갇혀 저 하늘을 더 바라볼 수 없도록
세 남자는 한 여인을 사랑하되 그로 인해 죗값을 짊어져야 한다. 'Belle'은 이 비극적인 로맨스를 단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한 노래이기도 하다. 'Belle'의 무대에서 콰지모도, 프롤로, 페뷔스, 에스메랄다 4인의 캐릭터들은 각자의 위치에 가만히 자리한 채 목청을 뽐낸다. 이 모습은 스펙터클 할 것 없는 연출임에도 불구하고 가사의 의미와 캐릭터들의 관계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어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표적인 장면으로도 꼽힌다. 무대 앞쪽에 십자가 형태로 누워있는 에스메랄다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나란히 선 세 남자. 이 구도는 이 뮤지컬을 관통하는 사랑이라는 테마 그 자체다. 신분과 상황에 관계없이 사랑과 욕망의 대상 앞에 평등하게 자리한 세 개의 시선인 것이다. 한편 세 남자들과 마주한 관객은 그들의 시선과 절절한 노래를 정면으로 받고 있다. 각각 거칠고, 위엄 있고, 부드러운 음성이 같은 멜로디 위에 같은 대상을 향해 하나의 사랑을 서로 다른 사연으로 노래할 때 우리는 차마 크기를 저울질할 수 없는 사랑들을 한꺼번에 목도한다. 삼중창으로 채워진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마치 이들의 노래가(혹은 감정이) 객석 쪽으로 쏟아져내리는 것만 같다. 저 가운데에 여유롭게 누워있는 에스메랄다의 심정이 궁금할 정도로.
(페뷔스) Belle 검은 너의 두 눈 유혹의 눈빛 그 누구도 거부할 수는 없지
무지개처럼 치마를 휘날리며 춤추는 넌 내게 마법을 걸지
'노트르담 드 파리'는 프랑스인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작품 중 하나다. 프랑스에서는 초연이 개막하기 전 뮤지컬 앨범부터 발매되었는데, 그중 'Belle'은 싱글차트에서 44주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시적인 가사는 '노트르담 드 파리'는 물론 유명한 프랑스 뮤지컬의 넘버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Belle'이 여전히 손에 꼽히는 이유는 단지 멜로디와 가삿말의 단편적인 매력뿐만이 아닐 것이다. 좁게는 주요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극적인 표현력, 넓게는 이 뮤지컬의 테마와 분위기, 철학을 체현하고 있는 묵직한 힘 덕분이다. 그래서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인상 깊게 본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려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 무대의 명화 같은 장면과 공연장 안에 어지럽게 넘실댔던 세 남자들의 욕망에 대한 느낌이 소환되어 그에 다시 홀로 침전되곤 하는지도 모르겠다.
(콰지모도, 프롤로, 페뷔스) 그 치맛자락에 붙들린 내 눈길 이런 내 기도에 의미가 있을까
그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가 이 땅에 살아갈 가치도 없는 자
오 루시퍼 오 단 한 번만 그녀를 만져볼 수 있게 해주오 에스메랄다
본래 '공감'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내가 어머니를 잃었고 지금 내 앞에 네가 어머니를 잃고 슬퍼하고 있다 해도, 나는 진심으로 그 슬픔에 공감해줄 수 없다. 나는 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가상의 이야기와 가상의 캐릭터들에 대한 감정은 어련할까. 그러나 뮤지컬은 무대 위에 펼쳐진 가상의 세계에 관객이 마음으로 함께 어울리길 권한다. 마음이 마음에게 효과적으로 전해지기 위해 음악이 나선다. 언어라는 이성적 도구로 상황을 이해하고 눈으로 배우의 표정을 살피던 관객은 음악이 덧입혀졌을 때 또 다른 감각의 도움을 받게 된다. 캐릭터의 감정에 완벽하게 이입할 수는 없겠지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거나, 선율의 분위기에 맞춰 순간 강하게 빠져들 수는 있다. 그래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 그들은 노래할 수밖에 없다. 이 세 명의 남자들처럼.
(영상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홍광호 콰지모도의 'Belle'이다. 사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넘버들은 원어 버전으로 들어야 한다는 나름의 신념(?)이 있어 한국 배우들의 버전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홍광호 버전은 더더욱 그랬다. 영국의 귀족 신사 같은 '꿀성대'의 그가 콰지모도라니. 예상 밖에도 이 음성에서 그는 꽤 거친 소리를 낸다. 이런, 막상 들어보니 또 실황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