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대엔 포가 없었다

에드거 앨런 포

by 비따비



'신이 질투한 작가', '미국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19세기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자신의 작품세계처럼, 아니 그보다더 비극적이고 암울한 삶을 살다간 에드거 앨런 포. 뮤지컬은 역사가 남기고 간 인물을 지금 이순간 생생하게 만날 기회를 제공하곤 한다. 이 예술가의 삶은 어땠을까. 삶의 굴곡들은 그라는 사람과 그의 놀라운 작품들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예매를 하고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음악과 무대로 그려낸 포를 만나게 되리라고 기대했고 당연히 그 만남에 대한 글을 쓰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연장을 나설 즈음엔 그럴 수가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 곳엔 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쓰고만 것은 그 날 열연하고 열창했던 배우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다. 그들에겐 잘못이 없으니, 나는 물론 커튼콜 때는 열심히 박수를 쳤다. 다만 객석을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드는 그들을 보며 작은 의문은 들었던 것 같다. 배우들, 특히 포와 그리스월드를 맡은 이들은 어떻게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었을까. 머리로는 이해했을 지라도 가슴으로는 어려웠지 않았을까. 포가 없는 포의 극인데.



<에드거 앨런 포>는 19세기 최고의 미국 시인/소설가인 포의 굴곡진 삶을 담은 전형적인 인물 중심의 뮤지컬이다. 여기서 '전형적'이라 함은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 극의 중심 소재가 되어 그/그녀가 겪었던 굵직한 사건들, 주변 인물, (예술가일 경우) 작품 세계 등을 담아 그 드라마틱한 인생여정을 그려내는 것을 뜻한다. 이 포맷은 배우 중심의 공연 문화가 형성된 우리 뮤지컬 시장에서 특히 자주 발견되곤 한다. <모차르트!>, <살리에르>, <마타하리>, <엘리자벳>, <영웅>, <파리넬리>, <마리 앙투아네트>, <황태자 루돌프>, <빈센트 반 고흐> 등 역사적 위인을 그린 많은 작품들이 국내 관객들의 사랑을 누렸다. 그 중에서도 단골 소재는 단연 '훌륭한 예술가'다. 무대 위에 그려진 그들은 늘 천재성과 광기를 오가며, 주변의 시기 및 질투에 곤경에 빠지고,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데 실패한다. 그들의 라이벌과 같은 안타고니스트들은 주인공과 뚜렷하게 대척점에 서서 비운의 천재들을 비극으로 몰고 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뮤지컬은 예술가들이 천재성과 내면의 외로움, 고통에 몸부림 치는 모습을 즐겨 묘사하곤 한다. 사실 너무 즐겨버려서 사뭇 식상하기까지 하다.

천재와 그 개인의 비극사를 다룬 뮤지컬은 뻔해져 버렸다. 이전의 작품들 모두가 비슷한 노선을 걸었고, 이번에 초연된 라이센스작 <에드거 앨런 포> 역시 그렇다. 그럼에도 이런 주제의 뮤지컬이 새로울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다름아닌 주인공에게 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민스러웠던 점은 무엇인지, 그에게 예술이란, 사랑이란 어떤 의미였는지. 작품마다 큰 줄기는 같을지언정 개개의 결들에겐 개성이 있다. 게다가 우리는 대단한 인물의 추락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더욱 궁금해하곤 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유명한 첫 문장은 이렇지 않던가.- "행복한 가정은 이유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그 이유가 제각각이다." 제각각의 이유 속에서 그 주인공은 저만의 고유한 삶을 영위하는 법이다. 그의 삶의 생명력이 관객으로까지 닿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럼으로써 관객이 한 위인의 인간성을 발견하고 그에 공감하며 삶에 함께 몰입하게 되는 법이다.


cf9d325287ac403893a58e25131d1a32.jpg 에드거 앨런 포 역의 마이클리


그렇지 못한 경우가 <에드거 앨런 포>였다. 무대 위에서 포는 자신의 고통이든 희열이든 잠깐의 행복이든 그 무엇의 감정이든 정확하게 전하지 못했다. 포라는 인물의 개성이 상실한 극에서 그를 둘러싸고 거듭 벌어지는 사건들은 평범한 비극을 조성하는 데 그친다. 대개 그랬듯, 부모를 여의고 사랑하는 부인도 떠나고 재능은 질투를 사고 그럴수록 광적으로 일에 매달리는 그저 그런 드라마가 되어 버린다. 왜 '진짜' 포를 충분히 그리지 않았을까. 그의 작품이며 성격에 대한 묘사는 턱없이 부족하다. 유일한 언급은 포의 대표작인 '갈가마귀'를 표현한 음악이다. 그러나 이 인물을 잘 모르는 대다수의 (한국)관객들에게, '갈가마귀'를 웅장하게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무대는 작가의 사상을 전달하기엔 다소 불친절하다. 그에게 글쓰기란, 작가의 삶이란, 엘마이라와 버지니아라는 여인들이란... 이런 질문들에 진솔하게 답변하지 않고 비극만 자꾸 맞닥뜨린다. 그러니 심경을 표현하는 그로테스크한 군무들 역시 점점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양상이다. 장면마다 포가 느낄 슬픔과 고통은 다를 것인데, 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답답하다.


그리스월드 역의 정상윤

주인공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말하기'보다 극 중 그의 안타고니스트에 의해 자꾸만 '말해진다'. 분장, 음색, 등장에 대한 묘사 전부가 악랄한 그리스월드는 포를 비극으로 몰고 가는 일등 공신이다. 여기서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월드가 저지른 일들의 원인은 라이벌 시인의 질투인가, 아니면 무지한 목사의 신앙심인가. 라이벌의식이었다고 하기엔 마냥 악랄한 이중인격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이고, 왜곡된 신앙심이라고 하기엔 포를 악으로 몰아가는 논리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포와 비슷하게 이 악의 캐릭터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명료하게 밝히지 못한 채 못된 거짓말쟁이로 각인될 뿐이다. 이에 휘둘리는 포의 인생은 말할 것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존재감과 비중은 주인공 못지않게 커서 굵직한 인상을 남긴다. 캐릭터 고유의 인상이라기보단 일차원적인 어둠과 악의 이미지들로 말이다. 물론 관객으로서 그 자체를 즐긴 때가 있었다. 절정에 다다른 포와 그리스월드의 연기에는 순간순간 시선을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 후 남는 것은 '극'이라기보다 찰나의 장면과 눈과 귀를 자극한 감각들이었다.


포를 진정으로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이해해보려 노력할 수는 있었다. 한 인물의 삶에 가득했던 비극의 단상들이 한 데 응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을 내내 음산하게 감싸는 기운들은 그토록 지극한 비극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게 만들었다. 이 뮤지컬은 비극적 이미지에 충실하여 포의 삶이 얼마나 안타까웠고 그의 심정이 내내 얼마나 어지러웠는지를 줄곧 호소하는 것이다. 예컨대 거대한 검은 날개 형상의 무대 장치를 무대 전반에 드리우고, 밝은 무대 뒤에는 항상 어둠과 음산함을 자리시켰다. 파란색, 보라색, 붉은색의 조명들이 길거리와 방과 예식장을 지배한다. 물론 극이 힘을 잃은 상태이기에 관객은 까마귀의 날개와 깃털 달린 펜의 단상들로 시각적 즐거움을 충족할 뿐이다. 덩달아 비극성과 서정성, 웅장함을 갖춘 좋은 음악들도 순간의 심각한 감정, 비극을 예고하는 사운드, 배우의 가창력 정도를 남기는 데 머무를 뿐 어디로든 깊이 스며드는 데는 실패한다. 결국 이래저래 아쉬움의 탓을 또다시 '그'에게 돌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주인공, 에드거 앨런 포 말이다.


글의 마무리를 앞두고 문득 다소 엉뚱한 질문이 떠올랐다. 관객에게 포를 낱낱이 이해시키는 것은 이 뮤지컬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일까? 역으로 한 인물의 고통스러운 인생사를 효과적인 이미지들로 펼쳐놓는 데 그저 포가 이용됐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글은 그저 생각 많은 관객의 투정일 터였다. 그래도, 다시 봐도 이 작품의 제목은 <에드거 앨런 포>다. 분명 포의 감정과 생각을 노래하겠다는 목적을 드러내고 있다. 안타깝게도 목적을 달성해줄 당사자가 없었다. 21세기 무대 위에 재현된 포의 삶에는 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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