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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따비 Jul 28. 2016

어딘지 모르게 뭉근하게 따뜻함

라흐마니노프

<노트르담 드 파리>, <위키드>, <스위니 토드>, <브로드웨이 42번가>... 웅장한 무대와 화려한 의상들,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고음과 성량으로 빽빽한 무대에 한참 젖어있다보면, 이따금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반동심리 같은 것이 있다. 대극장 공연에서는 느낄 수 없는 '다른 미학'을 향한 그리움이랄까. 이를테면 아담한 공연장, 비교적 짧은 공연시간, 소수의 배우들, 주요 악기 몇 개가 들려주는 음악만으로 완성된 작품 말이다. 배우의 호흡과 숨소리가 생생하고, 하나의 선율도 작은 무대와 백 여 개의 객석에 충분히 내려앉고, 그래서 그 공연에 내가 꽉 들어선 듯한 묘한 기분을 선사하는 것. 게다가 이런 작은 공연들은 대극장 공연들의 소위 흥행공식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테마나 표현방식이 자유로운 편이다. 비슷비슷한 노래와 스토리의 짜깁기가 많은 뮤지컬 시장에서 그래도 조금은 색다른 것을 찾아가 본다는 재미가 쏠쏠한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는 그런 길에 서있다. 과욕을 부리지 않고 자신이 선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만큼을 시도한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를 주인공으로 세웠지만 그의 생애를 전부 다루는 대신 그에게 중요했을 짧은 에피소드 하나로 90분을 이어간다. 단 두 명의 배우가 등장하여 라흐마니노프의 이야기에 집중하되 두 캐릭터의 관계를 그려나가는 것이 극의 큰 골자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요 테마라 함은 라흐마니노프의 실제 연주곡들이 전면에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동숭홀의 작은 공간에서 두 남자는 어떤 음악가의 생의 한 단면을 차근차근 그려나간다. 이는 <모차르트!>나 <살리에르>, <에드거 앨런 포>와는 사뭇 다른 결인데, 작품의 분위기는 <빈센트 반 고흐>와 더 닮아 있다. 두 배우의 밀도 높은 연기로 극을 이끌고 실존했던 예술가의 색깔을 그의 그림으로, 혹은 그의 음악으로 진득하게 담아낸 덕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를 제작한 HJ컬처의 신작이었다.)


<라흐마니노프>가 공연되는 동숭홀은 은근히 포근했다. '은근히'라는 단어의 선택은 작품의 분위기가 사실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첫 교향곡이 완전히 외면받은 데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모습으로 첫 씬을 띄운다. 그런 그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의학박사 니콜라이 달이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번지기 시작하고, 라흐마니노프의 숨겨진 사연들은 부정적인 감정들로 끝맺곤 하여 시종일관 극을 어둡게 만든다. 주연 배우의 울부짖는 고함과 눈물 젖은 고백들이 관객의 뇌리에 박히게 한다. 그럼에도 이 뮤지컬을 놓고 포근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이야기 바탕에 자리한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들' 때문이다. 유명인을 주인공으로 세웠지만 이 뮤지컬은 라흐마니노프라는 거창한 브랜드를 이용하기보다 그를 그저 한 음악가이자 인간으로 대한다. 과거의 아픈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되어버린 내면의 상처와 고민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가족애와 죄책감 같은 평범한 감정들을 극의 주요 재료로 삼는다. '아픔-치유-희망의 발견'이라는 전개는 다소 식상하긴 하지만 치유라는 큰 테마에 효과적으로 엮인다. 게다가 익숙한 전개와 보편적인 공감의 어우러짐이란 한편으로 관객 누구에게나 무리 없이 전해질 수 있는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흘러간 시간에 덮어뒀던 아픈 사연들, 그리고 그와 함께 요동치는 캐릭터의 감정들을 표현하는 뮤지컬의 핵심도구는 단연 음악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음악이다. <라흐마니노프>에서는 주인공의 희로애락의 순간순간마다 그가 직접 음표를 그려 넣었을 선율이 다양하게 얹힌다. 이미 널리 인정받은 선율들이 그 작곡가를 주연으로 한 드라마와 어우러질 때, 뮤지컬은 음악의 퀄리티를 보장받고 기존의 곡은 이 무대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바로 그 사람의 음악으로 그 삶의 한 단면을 이해받는 기분은 묘하다. 아마 실존 음악가를 다룬 뮤지컬만의 묘미가 아닐까. 사실 그동안 음악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뮤지컬은 많았지만 막상 그의 음악을 넘버에 적극 활용한 작품은 드물었다. 클래식이 주는 특유의 고풍스러움이 주는 부담에서인지 혹은 음악을 짓는 데 그것이 오히려 굴레가 되는 것인지. 클래식 원본의 아름다움과 대중에게 편안하게 들리는 뮤지컬 음악 사이의 조율이 중요한 과제일 터, <라흐마니노프>는 이 작업에 괜찮은 선례가 될 만하다. 작은 극장은 피아노와 현악 4중주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충만하고 드라마와의 만남은 삐걱거림이 없다.



어딘지 모르게 뭉근하게 따뜻함. 자꾸 이 작품의 매력을 여기에서 찾는 것은 극이 가진 힐링 코드나, 클래식과 뮤지컬의 괜찮은 만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매력의 샘이 그곳에 집중되어 있는 탓이기도 하다. 두 남자의 심리전과 진득한 교감은 표면을 스쳐가는 데 그치고 라흐마니노프의 속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은 시종일관 나긋나긋하여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다. 겉보기와 다르게 참 얌전한 작품이었달까. 물론 무대에서 열연하는 배우들의 에너지는 '얌전하다'는 수식어와 어울러지 않지만 말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어두운 사연과 그로 인한 상처들, 치유에 도달하는 과정이 어디서 봄직한 느낌에 그쳐버린 것도 두 인물과 한 관객 사이의 깊숙한 교감이 부족했던 탓일 것이다. 2인극 소극장 공연 특유의 흡입력과 밀고 당기는 심리전의 미학, 촘촘한 극을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조금은 아쉬운 작품인 이유다.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의 관계가 형성되고 달이 라흐마니노프의 치료를 시도하는 모습들은 이 뮤지컬이 극적인 흡입력을 포기했던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대극장 공연에 눈과 귀가 지쳐있다면 이 뮤지컬은 작은 일탈이 되어줄 것이다. <모차르트!>와 <빈센트 반 고흐>를 보고 나왔을 때 나는 이 두 사람에게 한동안 매료되었더랬다. 뮤지컬에서 유명인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그저 한 인간으로서의 두 사람을 진하게 목도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이름을 걸었다면 관객에게 그 정도의 여운은 남겨줘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를 만난 이후부터는 약간의 수정이 필요할 것 같다. 유명한 예술가를 통해 평범하고 보편적인 이야기도 들려줄 수 있으며, 이러한 시각 또한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비록 이 작품으로 라흐마니노프라는 작곡가를 잘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없겠지만, 무대 위에 환생한 어느 위인과 짧은 시간 감정을 공유한 것만으로도 공연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커튼콜의 마지막 순간까지 들려주는 클래식 연주이야말로 이 작품의 보물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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