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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따비 Aug 05. 2016

판타지일 수 없는 살인극

잭 더 리퍼


※ 이 글은 뮤지컬 <잭 더 리퍼>에 대한 주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 멀기도 멀고 아주 특별할 것도 없었던 사건이다. 때는 1888년, 장소는 영국, 5명의 매춘부를 살해한 연쇄살인마. 그럼에도 콘텐츠 창작자들을 가장 자극하는 점은 잭이라는 이름의 그의 정체가 여전히 미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잭 더 리퍼>는 이 미지의 연쇄살인마를 정면으로 내세우되 풀리지 않은 진실을 상상해 픽션을 가미했다. 그리고 2016년 서울의 한 공연장에서 되살아난 잭은 관객들의 시선을 무리 없이 이끄는 중이다. 무엇이 오늘날의 우리를 여지없이 몰입시키고 성공적으로 이야기를 '완성'하게 하였을까. 관객들은, 2016년 재탄생한 잭과 어떻게 마주하는가.



올해 세 번째로 막을 올린 <잭 더 리퍼>는 원작인 체코 뮤지컬을 우리의 정서에 맞게 상당 부분 각색해 탄생했다. 음악이든 무대장치든, 화려하고 꽉 찬 스케일을 선호하는 한국 관객들의 입맛에 미달인 요소는 딱히 없다. 특히 연쇄살인범이라는 소재는 무더운 여름에 지쳐있을 심신을 만족시키기에 제격일 터. 살인마 잭은 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나 살인을 저지르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지속시키고 죽음과 절규, 슬픔과 조롱 섞인 웃음이 공존하는 장면들은 어두운 극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주조연 배우들의 시원시원한 노래가 '뮤지컬스러운 무대'를 선사하는 한편 다양한 테마의 군중 안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비록 선량한 남자 주인공과 소박한 꿈을 꾸는 여성 캐릭터가 사랑에 빠지고 그녀가 잭의 희생양이 된다는 초반 전개는 식상하지만 극을 지루하지 않게 채워가는 극본과 연출의 힘이 있다. 무엇보다 다니엘과 잭의 진짜 관계가 드러나는 2막 끝자락은 반전의 극적 효과를 톡톡히 발휘한다. 반전은 멋들어진 결말을 책임질 뿐 아니라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마저 새롭게 써낸다.


초반 전개의 식상함에 실망하고 있던 차, 2막 후반부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씬에 이르렀을 때 갑작스레 휘몰아친 혼란과 맞닥뜨려야 한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음에 머뭇거림은 잠시, 서서히 명확해지는 진실에 몰입도는 한층 깊어진다. 식상한 전개라고,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가 너무 별 게 없었다고, 미스터리와 공포로 점철되어야 했을 잭의 이미지가 너무 '쇼 맨'스럽다고 내심 불만을 품었던 요소들이 그즈음에 이르르면 머릿속에서 하나씩 자기변호를 시작한다. 살인을 의뢰하며 잭과 계약을 맺었다던 다니엘이 사실은 진짜 살인마였다는 것, 요란한 보랏빛 의상을 입고 무대를 횡단하던 잭은 사실 어느 순간부터 허상일 뿐이었다는 것. 이 뮤지컬이 고안해낸 비장의 무기에 비로소 그 어설픈 요소들이 그렇게 재현되어야만 했던 이유가 납득이 되는 것이다. 물론 매력적인 결말이 모든 것을 보상해주지는 않는다. 반전의 직전까지 평범한 캐릭터들과 이야기의 전개, 예상과 다를뿐더러 매력적이지도 않은 잭의 이미지에 실망했던 경험은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반전을 마주했을 때의 기묘한 느낌이다. 선량하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던 주인공이 다름 아닌 그 살인마였다는 진실과 직시하는 건, 어쩌면 끔찍한 살인 장면보다 더욱 공포스럽다. 범인의 이름이 잭이라고 고발하던 다니엘이 "내가 바로 잭"이라고 외쳐버릴 때, 반전의 짜릿함과 이유가 짐작 가능한 불쾌함이 뒤섞인다. 선한 인물을 향한 믿음이 순식간에 무너진 느낌은 유쾌하지 않지만 충격이 강한 만큼 여운을 떨쳐내기 힘들다. 그렇게 냉혹하게도 <잭 더 리퍼>는 인간다움과 비인간성이란 종이 한 장의 차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하는 이중인격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핵심 설정들이 실제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더라도 이 메시지가 그럴듯하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애틋한 사연을 감춘 이가 안타깝게 비틀려 희대의 살인마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낭만적인 살인극'은 사실 그리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객석에 앉아있던 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오늘날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무수한 사건들을 떠올린다. 그 기시감이야말로 1888년 영국의 미스터리 사건을 성공적으로 재현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죄 없는 이를 죽이는 살인범 외에도 오늘날 이 사회의 단상들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은 여럿이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언론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일들을 좇고 자극성이야말로 최고의 뉴스가치로 간주된다. 잭의 타깃이 매춘부였다는 점에서는 자연스레 최근 점화된 여성 혐오범죄 논쟁이 연상된다. 사회의 비극적 단면들은 무대 위에서 웃음과 비판을 함께 버무린 블랙코미디로 그려진다. 형형색색의 색감과 극적인 음악은 이를 대하는 관객이 직접적으로 언짢아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효과적인 장치다. 그럼에도 저 가상의 이야기가 내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과 그리 이질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한 때 그 살인마의 감정에 공감했었다. 심지어 속사정을 다 알고 그의 감정의 흐름을 따랐던 탓에 진실이 드러났을 때도 그에게 연민을 느끼기 십상이다. 다니엘은 용서받을 수 없지만 마냥 증오하기도 어려운 인물인 것이다. 선과 악의 뚜렷한 구분이 사라지고 사람과 사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을 흔든다. 가장 극악무도한 행위라는 살인을 두고도 그럴 수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 참 어렵지 않은가.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하기조차 쉽지 않다.



마침 같은 시기에 공연되고 있는 <스위니 토드>는 <잭 더 리퍼>와 비슷한 점이 많다. 연쇄살인범이 주인공이며 그의 살인에 나름의 이유가 있어 관객은 당연히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며 그에게 동정을 느낀다. 살인으로 점철된 극에는 유희적인 면 또한 섞여 있다. 다만 스위니의 이야기는 판타지나 동화에 가까운 반면 잭의 이야기는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현실주의를 지향한다. <잭 더 리퍼>의 장면마다 어디서 봄 직한 낯설지 않은 모습들이 자꾸 겹쳐지는 이유다. 살인을 소재로 삼은 뮤지컬은 많지만 관객이 <스위니 토드>나 <지킬 앤 하이드>를 소비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위니나 지킬이라는 특정 캐릭터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 인상을 남긴 경우와 달리, 이 뮤지컬은 곳곳에 잠재해있는 현실에 대한 기시감으로 작품을 각인시키게 만든다.


무대공연이란 본래 무대에서 벌이는 판타지다. 물론 완벽한 판타지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작품들은 사람과 삶과 우리의 사회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잭 더 리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대화라기보단, 질문이라는 단어가 적절해 보인다.) <잭 더 리퍼>가 판타지이길 기꺼이 거부하는 작품이라는 것만큼은 명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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