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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따비 Sep 09. 2016

오감으로 마주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도리안 그레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오스카 와일드의 대표작이 된 것은 이 소설에 가득한 유미주의와 탐미주의가 당시 영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유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오스카 와일드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만큼 그의 사상이 작품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아름다움'이라는 키워드를 둘러싸고 논쟁하는 세 인물(도리안, 헨리 그리고 배질)에 대해 오스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배질 홀워드는 내가 생각하는 나이고, 헨리 워튼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이고, 도리안 그레이는 내가 다른 시대에서 되고픈 나이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한 작가가 '아름다움', '쾌락', '선과 악' 같은 관념들에 대한 자신의 치열한 고민들을 담은 작품인 셈이다. 특히 소설의 전반부를 지배하고 있는 철학적 사유들은 그 자체만으로 '미(美)'에 훌륭한 고찰이라 할 만하다. 원작이 어떤 장르로 새롭게 변주되든, 작품의 생명력은 결국 유미주의를 둘러싼 논쟁에 있음이다. 혹여 이를 외면하고 '초상화와 맞바꾼 영혼'이라든가 '아름다운 외모를 잃지 않는 미소년'과 같은 소재에만 집중한다면 이내 표피뿐인 헐겁고 단편적인 서사와 마주해야 할 것이다.

사진출처: 씨제스컬쳐

그런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뮤지컬화 되었다. 화려하고 현학적인 언술을 자랑하는 소설이 오감을 적절하게 이용해야 하는 무대예술로 다시금 탄생했다. 쉽지 않은 과제에 개막 전부터 주변에선 우려와 기대가 뒤섞였고,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 지금은 호평과 악평 역시 두루 쏟아지고 있다.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게 유독 제각각인 장르가 공연이라지만, 이 창작 뮤지컬에 대해서도 평단과 대중은 갈림길을 걸을 모양이다. 그러나 잘했다, 못했다를 떠나 확실하게 고무적인 점 하나는 원작에 담긴 치열한 주제의식을 놓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미소년의 타락'과 같은 자극적인 소재나 주연배우들의 티켓파워에 기대 쉽고 뻔한 길을 가려하지 않았다는 것, 탐미주의라는 비일상적이고 사변적인 주제를 우리 대형 뮤지컬에서도 발견하도록 했다는 것, 그리고 그 주제를 잘 담아내려는 노력들이 음악과 무대와 다양한 연출에 묻어나 있다는 것. 이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텍스트가 이미지들로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 오직 언어로 나열된 사유들은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에서 시각, 청각이라는 감각적 기호로 표현된다. 아름다움의 가치, 선과 악의 기준, 욕망과 이성의 충돌을 놓고 뮤지컬은 음악으로 노래하고 무대미술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마도 연출진들은 이 난해한 작업을 <도리안 그레이>만의 개성이자 뮤지컬에서 새로운 시도들이 불가피한 이유로 간주했을 것이다. 기존의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던 신선한 기법들이 여럿 동원된 것이다. 도리안과 헨리의 극적인 정신상태를 노래할 때 미리 촬영한 영상을 무대와 겹쳐놓거나, 도리안이 경험하는 절정의 쾌락을 콘서트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군무로 표현해 시선을 압도하는 식이다. 도리안이 초상화 속 타락한 자신의 영혼과 갈등을 벌이는 장면 역시 음악과 무용으로 드라마틱하게 표현된다. 어둡지만 화려하고, 사악하지만 매혹적이다. 사뭇 강렬한 장면들이 부지런히 등장하면서 시각적, 청각적 자극을 촘촘하게 두드린다.

공연 문법이 지닌 주요 무기 중 하나는 배우다. 도리안, 헨리, 배질. 주제의식을 두고 삼각균형을 이루는 이 세 사람은 '주연 캐릭터'라는 장치와 김준수, 박은태, 최재웅이라는 배우의 아우라로 더욱 힘을 얻는다. 소설의 독자와 달리 관객은 주연 캐릭터(배우)라는 이름만으로 일단 그들에게 집중하고 그들 중심으로 공감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무대 위에서 교차하고 어우러지며 부딪힌다. 도리안을 쾌락의 길로 이끄는 헨리와 그에 반발하는 배질, 그 사이에서 갈등하며 서 있는 도리안의 모습은 마치 프로이트의 초자아-자아-이드의 관계를 시각화한 것도 같다. 그래서 세 배우들이 빚는 삼중창은 선과 악의 정의, 진실한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한 <도리안 그레이>만의 표현방식이 된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 세 사람이 서 있는 구도 혹은 서로 교차하는 그들의 노래만으로 복잡한 관계는 시각적, 청각적으로 표현되곤 한다.


그렇게 관객은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청년의 존재와 그가 경험하는 쾌락, 동시에 진행되는 영혼의 타락, 즉 젊음에 영혼을 판 한 남자의 비극을 눈과 귀로 마주한다. 작품은 화려한 조명들과 어둠을 대비시키고 도리안의 어지러운 감정들을 음표로 옮겨 원작의 철학적인 관념들을 직관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때때로 서사 사이의 성긴 부분이 발견되어도 어쩔 수 없다. 각 장면이 그리고자 하는 관념, 고민, 인물의 감정들에 충실한 작품이니까. 마치 원작 소설처럼 말이다. 따라서 적어도 순간순간 장면에 몰입했다면, 연출진이 바라는 바는 상당 부분 달성되었을 것이다. <도리안 그레이>는 긴밀한 설득력보단 작품이 던지는 질문과 주요 인물들에게 휘몰아치는 감정에 의심 없이 동참해주길 기대하는 뮤지컬이다. 논리와 이성보단 지금 이 순간 그저 도리안의 모습을 바라보길 권한다. 극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 그는 당신의 눈에 '여전히' 아름다운가.


김준수 없는 <도리안 그레이>?


사진출처: 씨제스컬쳐

아무리 감각적이고 직관적일지라도 여전히 가사는 현학적이고 주제는 쉽지 않다. 자칫 공연을 즐기기도,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위치로 삐끗하기 십상이다. 그 중심을 잡는 것은 주요 캐릭터인 도리안 그레이다. 원작의 내용 자체가 촘촘한 개연성보다는 관념들의 나열로 주요 캐릭터들의 성격과 행동들의 핵심을 결정짓는데, 헐거운 서사에 독특한 흡입력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도리안이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외모와 순수한 마음을 지닌 청년으로, 화가 배질이 예술작품으로서 숭배하고 사랑했던 아름다움의 정수다. 즉 도리안이라는 존재가 곧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을 논해야 한다면 바로 도리안에서 시작해야 한다. 책 속에서 공상으로만 가능했던 이런 캐릭터가 무대 위 살아있는 한 배우로 표현되고 그 존재가 관객과 직접 마주할 때, 해당 배우는 도리안 그레이의 아우라를 체현할 수 있어야 한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의 존재와 말 한마디에 서사와 감정을 설득하고 몰입시켜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외모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정신적 순수함, 쾌락에 점점 젖어들어갈 때의 변화와 끝내 타락한 영혼의 현현. 이 무대에서 도리안이라는 캐릭터의 무게는 상상 이상이다.


<도리안 그레이>는 사실 처음부터 그 무기를 확보했는지도 모른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의 제작은 '김준수의 도리안 그레이'로 출발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조용신 예술감독은 <엘리자벳>의 토드를 연기하는 그를 보면서 무대 위에서 특히 독보적인 이 배우의 존재감을 확인했고, 김준수라면 자신이 꿈꿔왔던 도리안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지나 연출가는 김준수의 캐스팅 소식에 기존 뮤지컬에 없던 무용을 적극 가미했다. 도리안의 등장부터 1막 엔딩의 군무까지, 유독 도리안의 아름다움과 그가 체현하는 쾌락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동반하는 동작들로 표현된다. 다르게 말해 <도리안 그레이>는 사실상 김준수라는 배우가 잘할 수 있는 요소들로 충만한 뮤지컬인 셈이다. 지금, 2016년 <도리안 그레이> 초연에서 김준수 원캐스트로 공연되는 도리안은 만족스럽다. 그러나 작품의 질이 한 배우에게 상당히 기대고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의 미래에 의문을 남긴다. 그것이 김준수의 아우라로 초연을 치른 <도리안 그레이>의 또 다른 과제일 것이다. 혹은 도리안이라는 기묘한 캐릭터를 내세운 원작 자체의 잘못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뮤지컬의 진짜 문제는 그런 원작을 채택했다는 것일지도.


도리안 그레이의 어떤 발자취


사진출처: 씨제스컬쳐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작품을 좋아한다. 너무 뻔한 권선징악이나 어디서 본 듯한 캐릭터, '뮤지컬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어떤 코드들에는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버무려진 음악이 아름답다면 그 음악 자체를 즐기겠지만 자꾸만 곱씹어보게 하는 무언가에는 늘 갈증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도리안 그레이>의 출현은 반갑고 설렌다. 철학적인 관념들을 음악과 무대예술로 그려내려 애쓴 흔적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도리안 그레이>를 놓고 벌어지는 부정적인 평가들도 수긍한다. 특히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향한 대중의 시선에서 <도리안 그레이>는 아직 서툰 점이 많고 때로 불친절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애정을 가질 수 있다면, 우선은 공연장을 나오는 뮤지컬 관객도 단순한 감동 대신 생각할 거리를 선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던 덕분이다. 이제는 뮤지컬도 그럴 만한 장르이며, 무대미학이 그것을 보다 세련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도록 발전하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애정의 다른 근거는, 그 가능성의 결과물이 아직은 조금 어설프고(영상) 낯설지만(춤), 신선한 자극으로 관극의 재미를 보탰기 때문이다. 마치 점점 더 깊이 쾌락을 좇던 도리안의 길을 따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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