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죽지 않으려면
건강한 땅에 내어준다는 것
나무가 모든 진액을 허한 땅에 내어주면, 결국 스스로도 말라죽고 만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관계 속에서 늘 퍼주는 삶을 살아왔다.
돌아보면, 언제나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 당연한 듯 여겨졌다.
어떤 기준으로 내 감정과 에너지를 분배해야 하는지,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체력이 좋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열정과 패기가 넘쳐서였을까?
마치 내 안에 무한한 에너지가 존재하는 듯,
내가 줄 수 있는 총량이 10이라면 언제나 12를 주었다.
당연히, 바짓가랑이가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 가훈은 “남을 배려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
아버지는 대쪽 같은 분이셨다.
어릴 적, 나는 등교 전 현관문 앞에서 다섯 번이나 큰 소리로 이 말을 외쳐야만 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문이 열리고, 학교로 향할 수 있었다.
그 가훈은 내 삶의 뿌리가 되었고,
나는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지쳐 있었다.
주고, 또 주어도 돌아오는 것은 기대만큼 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탓할 수 없었다.
누굴 원망하겠는가?
아버지를? 가훈을?
아니다.
어쩌면 나는 본래 그렇게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나에게 조언했다.
“앞으로는 신중하게 생각한 뒤, 먼저 5만 주고, 그다음에 더 줄지 말지를 결정해.”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하면 상처받지 않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계산이 피곤했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관계는 너무 인위적이고,
진심이 배제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맘껏 퍼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처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내 욕심이었다.
이타적인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도,
그만큼의 보답을 기대하는 마음도.
기대가 크지 않았다면 실망도 없었을 테고,
상처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기대하고, 실망하고, 아파했던 것은 결국 내 욕심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지금까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마저도 합리화되었다.
애초에 바라지 않았다면,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나는 여전히 주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그 행위 자체에 가치를 두기로 했다.
무조건적인 나눔이 아니라, 건강한 땅에 내어줄 줄 아는 지혜를 배우기로 했다.
내가 준 것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면, 상처받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기대가 없는 선물은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바짓가랑이가 찢어질 만큼 내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누는 기쁨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가진 것을 주되, 허한 땅이 아닌 건강한 땅에 내어주려 한다.
그렇게 흘러간 마음은 더 이상 나를 지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가 주고 싶어서 주었을 뿐, 그것으로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