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세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2017.03.10
To. 엄마
탄핵. 오늘 드디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었어요. 근무 중이라 비상대기 차량의 라디오로 생중계를 듣는데, 만장일치로 탄핵이 인용되었다는 말에 같이 있던 셋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네요. 아직 우리나라가 살만한 나라긴 하구나. 우리나라가 아직은 우리가 그렇게 불안해하고 무서워하던 모습이 되지는 않았구나. 아직 우리는 죽은 국가가 아니구나 라는 귀중하고 즐거운 감상. 오늘은 참 즐거운 날이었네요.
역사의 순간을 함께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실 이번 일은 내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기다렸던 첫 번째 일이라 감상이 조금 남달랐던 것 같아요. 국회 탄핵소추 안 가결도 생중계로 지켜보았고, 탄핵안 인용도 생중계로 들었네요. 지금껏 시대를 걱정해본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역사적 순간을 함께 해봤다는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이제는 이 역사의 흐름에 내가 함께 가고 있는 느낌. 교과서에서 배웠던 과거의 일들과는 사뭇 다른 일이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의 일들이 벌어지는 이 시퀀스에 이제는 나도 책임이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개인의 책임감, 이 담담한 무게감이 뭔지. 그래도 절대 나쁘지는 않은 느낌인 것을 보면, 이 일로 내가 조금 더 진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의 세대가 그런 건지, 아니면 내 주변 사람들이 그런 건지. 요즘 우리들은 참 고민을 거부하지 않는 기특한 청춘이라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루에 한 번은 그래도 뉴스를 보고, 썰전은 꼭 챙겨보고, 자신이 겪어온 제도적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생각들을 거두지 않고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친구들. 우리는 이 시대에 욕심을 품고 살아가려나 봅니다.
모르죠. 어쩌면 그 전 세대도 이런 고민들을 했었고, 그 어린 고민을 붙들어주는 것이 20대라는 나이라, 그저 시간이 지나 모두가 그런 고민들을 놓쳐버린 것이었는지. 우리도 그렇게 될 시기가 올 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그 욕심을 붙들고 싶어서,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도록 서로를 붙잡고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어른이들이 세상을 바꾸는 그 날이 올 거라고 믿습니다.
날이 참 좋아요. 오늘은 세상에 꽃향이 도는지 올봄 처음으로 벌들이 차창을 두드리네요. 아직 세상에 문제들은 많지만, 그래도 오늘은 참 좋은 날입니다.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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