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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우 Jun 18. 2019

배워가는 사람들.

아흔세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To. 콩 아가씨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오고, 문재인 대통령은 동남아에 가고. 세상은 참 알아서 잘도 돌아가는데 당신의 세상은 어떨까 싶어 또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요 근래에는 공부하느라 몇 주 전화도 제대로 못한 바람에 마음껏 응원도 못했지만, 그래도 그 바쁨에 열심히 하고 있구나 위안을 얻고 마음 편히 당신의 선전을 바라고 있어요. 줄어든 통화지만 그 시간에도 가끔씩 너무 자기 이야기만 해버렸다며 나의 안부와 일상을 묻는 당신. 마치 마음 속에 마련해둔 자신만의 숙제를 챙기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깝긴 하지만 또 아직은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준비 잘 하고 있구나 하면서 나는 기다림을 버티어 가고 있어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다림의 연료를 채워가는 것과는 별개로, 당신의 면접 준비 과정을 듣는 것은 참 재밌었어요. 합격을 목표로 하는 일들이지만 그 사이사이 당신이라는 사람이 커가는 것이 또렷하게 보여 역시 이 사람은 사랑스럽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나의 연인은 참 고민이 많습니다. 요령이 부족한 자신을 등 떠밀기 위한 성실함과 성실하기 때문에 생기는 여러가지 귀여운 고민들. 하루는 말을 예쁘게 가다듬어야겠다며 시무룩해졌다가 그 다음 날에는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고, 완벽한 사람만이 사람들에게 개선을 부탁할 수 있는 것이냐며 힘없이 질문지를 들고 왔다가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궁리를 하며 소박한 열의를 빛내는. 내가 좋아하는 당신이 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부분 속에서, 내가 더 좋아할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로 재밌는 일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섞인 다양하고도 사소한 투정도 나는 마음에 들었다는 점을 애써 숨기진 않을게요.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들은 왜 그리도 귀여운 것일까요. 어쩌면 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것들이 특히나 귀여운 것들일지 모르겠지만 요즘 나는 이 부대 안에서도 귀여운 학생들을 많이 보고 있어요. 중대 대기실 책상에는 몇 주 전부터 글씨 교정용 교재가 놓여있어요. 24살짜리 글씨 교정생이 그리 성실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책상에 앉을 때마다 그 책이 눈에 밟히는 것을 보면 아직 포기한 것은 아닌 것 같아 기다려보려고 합니다. 또 영어 공부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던 동기는 이번 휴가 때 엄마가 읽던 영어회화 책을 들고 와 열심히 읽는 중이에요. 지난 번에 지게차 끌고 미군 지원을 나갔다가 총을 맞을 뻔 했다나 뭐라나. 말이 안 통해서 미군이 꺼낸 스마트폰 통역기에 '이 주변에'라고 말했더니 통역기에서 욕이 튀어나왔다네요. 대체 그 통역기는 뭐라고 들은 것일까요.


 그덕에 나도 무언가를 새로 배워볼까하고 생각중이에요. 상당히 이것 저것 다 잘 먹는 지식 잡식성이긴 하지만 뭐랄까 글이나 그림 말고 조금 다른 것들. 예를 들면 뜨개질이나 바느질 같은 손재주의 영역에도 눈이 가고 있어요. 무언가를 만드는 것만큼 담백한 것은 없으니까요. 좋은 글을 쓰고, 좋은 말을 내어주고, 좋은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되면 인생이 참 즐겁지 않겠어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려면 분명 내게서 정리해야만 하는 것들과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겠지만, 당당히 감수하고 잠시 동안만 야위어질까 해요. 겨울과 그 후의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괜히 소중한 단풍들을 떨구어 내는 게 아니잖아요.


 예쁘게 글을 매만져 편지를 쓰고 너에게 주면,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쩌면 나는 이 이야기들 중 일부를 잊어버릴 수도 있어요. 사람은 잘 잊는 동물이고, 모든 말을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니까 혹시 모르니 당신이 그 조금을 소중히 기억해줄래요? 내가 잊은 말 중에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 말들을 다시 들려주고요. 원래 주고 받은 말들은 둘이서 기억해야하는 것이니까요. 사랑해요.



2017.11.09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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