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네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To. 콩 아가씨
이번 주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전역 전 교육이라는 것을 받으러 다녀왔어요. ASSA 캠프라고도 하는데 "야, 너 이제 전역 3달밖에 안 남았어"라는 의미랍니다. 사실 전역 전 교육이라고 거창한 이름을 붙여놨지만 기초적인 재무교육이나 군생활 속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집단 상담, 현충원 견학 같이 별 새로울 것 없는 커리큘럼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배울 것은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 곧 전역이라는 체감만큼은 조금 강렬하게 다가오더라고요. 3달, 아니지 벌써 2월은 막바지니까 2달 반 남짓 후에는 전역이네요. 좋으면서도 걱정되는 묘한 기분. 그런 기분이 슬그머니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캠프라고 해봤자 비행단 안에서 하는 것이라 나머지 시간에는 평소처럼 부대를 돌아다녔어요. 갑자기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인지 하루에 '전역하시면'이라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 건지 주변이 좀 달라 보이기 시작했어요. 생각해보니 2달 남짓만 지나면 이 곳은 내가 다시는 오지 못할 곳이 되어버리더라고요. 다시는 오지 못할 곳이라니. 이렇게 싱숭생숭한 단어가 내 인생에 노크를 한 것은 정말 처음이었어요. 부대 안으로야 면회든 ADEX든 들어올 수야 있을지 몰라도 내 군생활의 태반을 보낸 이 활주로와 주기장, 작차중대는 보안도 보안인지라 정말 다시는 올 수 없을 것만 같더랍니다. 그래도 온갖 추억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곳들인데 못 올 거라는 생각이 드니 좀 서글펐어요. 여기서 지낸 시간이 꽤나 행복했던 것 때문일까요.
전역을 앞둔 모두가 그렇듯, 이쯤 되니 나도 걱정이 좀 되기 시작했어요.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커리어도 시작해야 하고, 복학해서 졸업도 해야 하고, 슬슬 돈도 모아야 하고 인생계획도 조금 더 짜임새 있게 잡아두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꽤나 알차게 군생활을 보낸 것 같은데도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더라고요. 대체 뭘까요. 100권도 넘게 책을 읽었고, 지금은 잠깐 느긋하게 휴식기를 가지고 있지만 나름 블로깅도 열심히 했고, 심지어 굴삭기 면허도 땄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세상이 좀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괜한 걱정인 것일까요.
하지만 여전히 난 전역이 반갑습니다. 글도 쓰고, 블로그도 하고, 여행도 다닐 수 있는, 하고 싶은 것을 당장 할 수 있다는 그 자유란 엄청난 것이니까요. 예전처럼 당신 곁을 떠날 걱정 없이 함께 있어줄 수도 있고요. 전역할 때 즈음에는 아직 제주도에 있겠지만, 꽃신은 그래도 꽃신이니까요.
집 떠나 머나먼 제주도로 연수를 떠난 당신, 도착하자마자 아파서 걱정을 시키더니 곧잘 적응한 것 같아 마음이 좀 놓여요. 남자 친구 전역까지 2달 반 남은 시점에 3달짜리 연수를 다녀오게 된 기묘한 스케줄이 섭섭할 수도 있지만 내가 3월, 4월 휴가를 틈타 제주도로 갈 테니 마음 풀어주길 바라요. 당고를 좋아하는 누나 생각이 나서 당고가 그려진 편지지를 골라봤어요. 제주도에 당고 먹을 곳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서울 올라오면 우리 자주 가던 당고집에 가서 데이트나 할까요. 오차즈케 한 그릇에 당고 두 개 입에 넣어두고, 손 잡고 창밖을 바라보는 데이트. 사랑스러운 당신이 당고보다도 단 미소를 지어줄 데이트.
그런 오월이 오기를, 당신과 함께할 오월이 오기를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바라봐야겠어요.
사랑합니다.
2018.02.28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