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To. 콩 아가씨
행복한 생일이었어요. 그렇게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덕분에 정말 행복했네요. 당신이 골라 온 전시는 시간을 들여 보고 싶을 정도로 짜임새 있었고, 전시에 솜씨 좋게 곁들여 준 이정현 씨의 시는 오늘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정도로 예뻤죠. 저렇게 예쁜 말을 써낼 수 있다는 사실에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당신을 향해 안겨주고픈 마음씨들을 닮아있어 기분이 한껏 달아오르기도 했어요. 당신이 먹고 싶다던 통인 시장의 기름 떡볶이도 우리 입맛에 알맞았고, 고개 너머로 해를 보내는 동안 종로에서 보낸 시간도 더없이 좋았죠. 폴라로이드 필름에 담겨 나오는 당신의 모습은 눈부셨고, 필름에 당신이 피어오르는 동안에 우리가 맛본 음식들도 썩 괜찮았어요. 용기 내어 시킨 와인들은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나의 하루는 이미 당신 하나로 완벽했기에 그 또한 추억할 거리로 남을 뿐이었죠. 꽃 한 송이 건네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아서 결국 노란 꽃 한 송이를 당신에게도 하나 들려주었고, 우리는 하루 종일 마음을 사로잡혀있던 이정현 씨의 시집을 서로에게 선물하며 하루를 매듭지었어요. 참 좋았어요.
사실은 나, 내 생일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좋아하지 않는다는 표현보다는 싫어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매해 가장 싫어하는 날을 고르라고 하면 그 답이 생일일지도 모를 정도로. 내 입으로 말해도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되도록이면 내 주변 사람들이 더 행복할 수 있게 노력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편을 더 좋아해요. 최대한 세심하게 챙겨주고, 그 대신 그만큼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사정으로 바쁘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을 때가 많고, 마음은 있더라도 그만큼을 표현하기에도 많이 서툴러서 다른 누군가를 잘 보듬어주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 그냥 나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좋아해 주고 말 뿐인 것이었죠.
그런데 실은 나도 그렇게 사랑받고 싶어요. 왜 아니겠어요, 사람인데. 생일은, 아마도 '쉽지 않은 거니까'라는 그 마음의 벽이 조금 흔들리는 날인가 봐요. 나를 위한 날이라고들 하니까. 그래서 계속 나 스스로 생각을 바꾸려고 했던 것 같아요. 내 생일은 내가 축하받는 날이 아니라고, 나로 인해 행복해질 다른 사람들이 축하받는 날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죠. 괜히 기대하면 조금 아프잖아요.
이번 생일에도 누나와 가족, 어쩌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낸 단톡방 하나를 제외하고 첫 축하는 밤 9시도 넘어서 처음 받았던 것 같아요, 그것도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형한테. 이해는 가요, 바쁘고, 사실 누가 요즘 호들갑스럽게 생일 챙겨주겠어요. 나 아닌 누군가가 축하해주겠지 같은 생각도 이해가 가고요. 그 사람들이 딱히 어제와 오늘이 다른 것은 아닌데, 괜히 서운해하면 안 되는 건데, 조금 서운하기도 하고, 서운해하는 내가 너무 추해 보여서 나는 내 생일이 싫었어요. 매해 내 생일이 조금 조금 아쉬웠죠.
그런데 이번 생일은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밤 10시 반 즈음인가 한 친구가 너무 늦었다며 미안하다고 축하를 겸한 사과를 보내는데, "괜찮아,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생일이었어"라고 답했거든요. 함께하지 못할 뻔했던 생일이라 그랬던 것인지, 이정현 씨의 시가 너무 좋았던 것인지, 그저 당신이 너무 예뻤던 덕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나는 주저 없이 행복했다고 할 수 있는 생일을 보낼 수 있었어요. 당신이 곁에 있어주었기 때문에, 그게 너무 좋았기 때문에.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행복했어요. 사랑해요.
2018.02.18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