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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우 Dec 04. 2015

나무 아래는 비가 내려요

따뜻한 날씨에 소담히 쌓인 눈

세상에 거칠게 스크래치를 내던 눈발이 어느새 잦아들었다. 녹듯이 흩어져가는 구름 뒤로 이미 세상을 가득 메운 햇살. 눈은 어느새 녹기 시작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건물을 나서며 맡은 것은 낯익은 스키장의 향기였다. 풍성하게 내려앉은 눈의 향기 그리고 옅은 담배 냄새. 21살이 되어서야 기억 속 스키장 향기의 정체를 알았다. 눈이 세차게 내리던, 그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던 아침은 짧은 강의 시간 (물론 체감상으로는 길다)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촉촉하게 젖은 세상, 비가 내린 후와는 다른 포근함이 좋다. 언덕길을 내려가 다음 강의실로 가는 길 중간에는 작은 나무 계단이 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어쩌면 너무나도 대학생 다운 나무가 그늘을 내린 작은 나무 계단. 사람들이 그 앞에 잠시 멈추어 선다. 눈이 그친 하늘, 사람들은 우산을 피고 계단을 내려간다. 굵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눈이 내린 후의 따뜻한 날씨, 나무 위에 쌓였던 눈송이들이 녹아 비가 내린다.  잔 가지 끝 끝에 알알히 물방울이 모여든 탓일까 바람이 스칠 때마다 굵디 굵은 물방울이 바닥을 친다. 눈이 오는 날에는 이상하게도 우산을 챙기기 싫다. 투둑투둑 물방울이 떨어지는 나무 계단. 결국은 후드를 쓰고 조심스럽게   걸어내려간다. 젖은 계단 위로  한두 잎 낙엽이 몸을 뉘었다. 툭, 툭. 나무 아래는 비가 내렸다.

길에는 눈이 다 녹았지만, 중앙 광장 잔디 위에는 아직 눈이 소담하게 쌓여있다. 눈을 밟지 않고 두어 장 사진을 찍는데, 지나가던 사람들도 잠시 걸음을 쉬고 사진을 담는다. 다 같이 각자의 사소한 추억을 간직한다. 빛깔이 좋은 추억. 길가의 눈을 쓸어내는 분들도 잠시 빗질을 멈추신다. 이제야 눈에 띄는 눈 위에 찍힌 유쾌한 발자국. 나도 자욱을 남길까 하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오후의 수업은 조금은 고됬다. 학기의 마무리를 짓는 발표가 있었고 어느새 오늘 눈이 내렸던가는 기억에서 잠시 잊혀졌다. 친구와의 대화, 오늘의 발표, 내일, 그리고  내일모레의 일들. 말 어귀에서 해야 할 일들을 담아  마음속에 적어 둔다. 오늘 밤도 조금은 바쁠 것 같다. 여자친구의 과제를 도와주고 집으로 오는 길. 역 앞을 나서는 길은 많이 추워졌고 속 깊이 시린 바람이 들어왔다. 그래도 무언가 힘이 남은 것은 아직 채 식지 않은 추억 때문일까. 문득 유난히 깨끗했던 오후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일도 어딘가에서는 눈이 내리고 오전 중에 그친다고 한다. 낮 기온은 다시 영상. 또다시 나무 아래에는 비가 내리나 보다. 따뜻한 추억이 녹아내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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