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2018.08.16-08.17
To. 가족
어제 편지에 이 이야기를 안 썼더라고요. 참 중요한 이야기인데, 아들 어제 일병이 되어버렸답니다.
드디어 긴 하루가 끝났어요. 길었던 막내의 하루가 끝났습니다. 밤 10시 30분을 넘어서 생활관 불도 소등하고 미등 밑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힘들어 쓰러질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나 일병 계급장은 가볍지만은 않네요. 드디어 블록 쌓기 놀이의 첫 발자국을 떼었는데 나머지 블록들이 대체 언제쯤 내게 올까 모르겠어요. 그래도 역시 이등병보다는 일병이 좋은 것 같으니 괜찮은 것일까요.
어젯밤, 일병 계급장과 일병 모자를 받고 나서 아버지 기수분들이 축하한다고 격려를 해주셨어요. 이제는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일하는 존재가 된 느낌. 일병 약장을 달고 중대에 가서 제 이름 앞에 적힌 일병이라는 계급을 보는데 '이제야 정말 이 곳의 일원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처음으로 무언가 일을 하는 것이 신나고 재미있던 것 같아요. 천천히 해도 되는 일들도 괜히 뛰어가서 하고 싶고, 조금 더 많은 일들을 배우고 싶고. 심지어 저는 일병 첫날부터 전화기 앞에 앉아서 배차 전화도 받아 볼 수도 있었어요. 긴장되고 떨리기도 했지만 제가 먼저 "해봐야 는다, 시켜달라"라고 이야기하며 전화를 받다 보니 금세 익숙해지더랍니다. 물론 아직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일을 배우고 내 몫을 해내는 것을 즐기면 앞으로의 생활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네요. 벌써 11시가 넘다니, 막내 생활을 시작하니 시간이 부족해지는 것 같아요. 내일마저 편지를 쓸게요.
아침이에요. 어제도 일찍 일어났는데 오늘도 5시 반이 되니 눈이 떠지더라고요. 물론 너무 일찍 일어난 것 같아 20분 정도 이불속에서 미적거리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5시 50분이라 정말 여유로운 아침이었어요. 오랜만에 아침에 면도도 하고, 이렇게 편지도 쓰니 기분이 좋네요. 점호하고 와서 몇 줄 더 글을 써야겠습니다.
걸레를 널고 왔어요. 맞선임 분들이 한창 막내일을 할 때 내가 운전병인지 청소병인지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정말 막내일의 8할 정도는 청소인 것 같습니다. 청소하고 걸레를 빨고, 걸레를 널고 화장실 청소하고. 쓰레기 버리고, 분리수거하고, 차량 점검하고. 돌아와서 걸레를 개고, 청소시간에 다시 분리수거를 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청소로 보내다 보면 금방 일과가 끝이 나요. 뭐 막내를 벗어나면 손에서 좀 놓겠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하다 보면 경험치가 좀 쌓여서 나중에 집안일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전 이렇게 상쾌한 마인드로 막내 생활을 해내고 있어요. 곧 있으면 출근이네요. 다녀올게요. 사랑해요.
2016.08.16-08.17 - 아들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