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편지, 진주 기본군사훈련단, 2016.06.03
To. 콩씨 + 가족
오늘은 예상치 못한 여유로운 하루라 편지 쓸 시간이 조금 많았어요. 방금 누나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 하나를 끝맺음 지었는데, 시간이 남아 지난번까지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질구레한 훈련소 생활에 대해 써볼 생각이에요. 이번에는 콩이 쪽에 보낼 테니 우리 가족들한테 다시 공유해주면 좋겠네요.
오늘은 정말로 하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오전에는 소대별로 돌아가면서 하는 급양 도우미가 우리 차례라 잠깐 다녀오는 것뿐이었고, 오후에는 총기 분해 결합 교육과 예방 접종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죠. 오랜만에 맞은 여유로운 하루. 덕분에 누나한테 편지도 쓰고 이렇게 편지 한 편을 더 쓸 수 있었는데 앞으로 이런 날이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급양 도우미 이야기가 나와서 그것부터 이야기를 해줄게요. 기본군사훈련단에서는 밥을 먹을 때마다 밥을 나눠주고, 쓰레기를 처리하고, 식판을 세척하고, 식당을 정리하는 일들도 훈련병들에게 분담을 시켜요. 기훈단에 함께 있던 선임(763기)들이 수료하기 전에는 선임들이 우리 몫도 해주었는데, 수료식 당일부터는 우리가 담당하고 있죠. 옛날에는 역할 분담을 자율적으로 맡겼는데 우리 기수부터는 뽑기로 추첨해서 역할을 나눠주기로 했다나 봐요. 급양 도우미 역할에는 '배식', '입장 안내' 같은 그나마 편한 것들부터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는 역할이나 쓰레기를 정리하는 역할처럼 사람들이 기피하는 역할들이 있는데, 저는 역할 표를 뽑아보니 그 위에 '꽝'이라고 쓰여있더랍니다.
'꽝'은 추첨 전에 그런 것이 있다는 설명도 없던 선택지라 처음에는 크게 당황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꽝'은 그 날 일손이 부족한 곳에 배치되는 일종의 유동인력 같은 거더라고요. 끼니마다 파트별로 "꽝 OO명 거수!" 하면 손 들고 그 일을 하게 되는 거라 다른 친구들과 크게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후에 알았어요. 그 날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힘든 일이 기다리는 곳에 배치되는 것임을. 그래도 지금은 어디 한 곳에 묶여 있는 것보다는 다양한 일을 해보는 게 좋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중이에요. 벌써 냉장창고 정리도 해보고, 산더미 같은 쓰레기 정리도 했는데 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훈련 말고 하는 것들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청소인 것 같아요. 우리가 있는 2대대 건물은 신축되고 있는 건물을 제외하고는 가장 좋은 시설이긴 하지만 그래도 청소할 곳이 많아요. 매일 나는 공공실이라고 불리는 화장실 청소에 배정되어 있는데, 별생각 없이 흥얼흥얼 닦고 쓸며 열심히 청소를 하다 보면 금방 끝나는 느낌이라 수월하게 하는 중입니다. 주말 마다는 클린 훈련단이라고 바깥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는 것이 있는데, 쓰레기도 줍고 풀이나 낙엽도 정리하고 하는 게 옛날에 중학교 다닐 때 하던 봉사랑 별 차이가 없어서 재미를 붙이고 있네요.
엄마나 누나가 보내주는 편지들을 보면, 요즘 들어 날씨가 많이 더워져서 훈련이 힘들까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진주 기본군사훈련단은 지금 해가 뜨면 덥고 해가 지면 싸늘한 까다로운 일교차를 자랑하고 있어요. 그 덕에 감기를 달고 사는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긴 한데, 다행히 나는 아직 멀쩡해서 건강하게 일정을 소화하고 있어요. 어디 받은 편지들 중에 답변해줄 걱정거리 또 있으려나. 아 엄마는 평소 나의 여유로운 삶의 방침에 군대 가서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 같은데, 사실 지금도 마음가짐은 여유로운 편인 것 같아요. 차렷하고 가만히 있고, 열중쉬어하고 가만히 있고. 방심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딱히 스트레스받을 것은 없달까요. 밖에 나가지 못하고 사랑하는 누나, 가족들이랑 연락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고민해봤자 해결되지 않는 문제니 과감히 마음에서 치워두고, 지금 당면한 문제들만을 두고 보면 마음이 여유롭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네요.
생각해보니 그저께에는 독특한 편지 한 통을 받았어요. 고려대 경영학과 동기인 친구가 지금 공군 병장인데 어떻게 내 주소를 찾아다 편지를 보냈더라고요. 군대에서 군인한테 편지를 받다니! 게다가 어떻게 이 곳 교육사령부 식단표를 구해다 넣어줘서 우리 호실은 훈련병 중 유일하게 앞으로의 메뉴를 아는 사람들이 되었어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훈련병들에게는 식단표를 주지 않았거든요. 친구 덕에 우연히 얻은 소소한 행복이에요. 바로 그 다음날 예상했던 메뉴 대신 유통기한이 이틀 남은 전투식량이 나와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즐겁게 지내고 있네요.
주말과 공휴일에는 편지를 안 부쳐주신다고 해서 이 편지는 아마도 화요일날 보내게 될 것 같아요. 현충일이 껴있는 게 이런 부작용이 있군요. 오늘은 비가 와서 우비를 쓰고 다녔어요.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를 걷는데, 어떤 친구가 런던 같다는 말을 하더랍니다. 저 친구 살만한가 보죠. 사실 저도 그래요. 살만 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주세요. 사랑해요 모두들.
p.s 누나! 우리 가족들에게 보내줄 때 사진을 조금 크게 찍어서 보내줄 수 있을까요? 글씨가 작아서 보기 힘드실지도 모르겠어요. 고마워요.
2016.06.03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
2년간의 편지는 공군 기본군사훈련단과 특기학교, 그리고 자대로 이어지는 군생활의 흐름에 따라 그 내용이 많이 달라집니다. 초반부에는 군에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자대로 가면 갈수록 그 내용이 연인과 가족, 친구와 나누는 더 깊고 섬세한 대화나 그 외 다양한 생각들에 대한 것들로 바뀌어 가요. 심지어는 연인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죠. 변해가는 내용을 유심히 봐주시면서 끝까지 함께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