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설을 뒤돌아보면, 시다(도움이), 졸작, R(과제 Repeat의 약자), 르코르뷔지에 등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마도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경우 특별히 슬라이드란 단어가 추가된다. 슬라이드를 모르는 MZ세대들도 많을지 모르겠지만, 필카, 즉 필름 카메라는 다들 알 것이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보면, 다시 아날로그 감성 소품 또는 취미 생활의 일환으로 일부 마니아 층이 생기고 있으니 말이다.
대학시절, 나와 동기들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건축전공인 남자 주인공이 첫사랑 수지를 몰래 찍던 그 필름 카메라를 실제 사용했었다. 필름 카메라에 24컷 또는 36컷을 찍을 수 있는 35mm 롤필름을 넣고 신중하게 조리개와 셔터스피드를 조정하여 건축물을 찍어 사진관에 인화를 맡기면 다음날 진갈색으로 인화된 필름과 인화지에 출력된 사진을 받을 수 있었다.
슬라이드 필름(slide Film) : 슬라이드 영사기에 넣고 투영(投影)하는 포지티브 필름
이와 더불어, 나는 가끔 일반 필름보다 비싼 슬라이드 필름을 카메라에 장착하고 사진을 찍곤 했다. 촬영한 슬라이드 필름을 사진관에 맡기면 2~3일 후에 칼라로 인화된 필름을 얇은 플라스틱 프레임에 끼워 넣은 슬라이드가 담긴 박스를 수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비용과 시간이 더 들어간 결과물이 나오는 날이면, 손에 받아 들고 발을 재촉하여 자취방에 들어가 천장의 형광등을 켜고 조명 방향으로 슬라이드를 향하게 한 후,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시켜 가며 '루페'를 사용해 슬라이드 속 이미지를 한 장 한 장 확인하던 기억이 난다.
루페(lupe) : 볼록렌즈를 사용한 디자인 작업용 확대경으로 인쇄물, 필름의 화선, 망점 등의 상태를 검사하는 데 사용되며 10-20배 정도의 배율로 만들어짐
그냥 볼 땐 안 보이던 사진 속 다양한 피사체가 루페를 통해 확대되어 눈앞에 펼쳐질 때의 환희는 실제 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다. 물론 슬라이드 중에서 초점이 맞지 않는 것들이 발견될 때마다, 아쉬움의 한숨이 절로 나오긴 하지만 말이다.
나중에 큰맘 먹고 슬라이드 환등기 사서 이러한 희열과 아쉬움을 대화면으로도 느낄 수 있게 되었지만(환등기와의 추억은 다음에), 작은 프레임 속에 숨겨진 피사체들이 한눈에 가득 들어오는 특유의 느낌이 좋아 그 이후로도 사진관에서 찾아온 슬라이드를 처음 확인하는 작업은 항상 루페를 사용했었다.
루페와 슬라이드
다시 루페로 슬라이드를 들여보다
이렇게 정성을 들여 찍었던 슬라이드를 보며 당시로의 추억여행을 하던 중,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설계사무소에서 찍은 슬라이드 한 장에 눈이 멈춰 섰다.
그건 내가 디자인한 안이 처음으로 건축설계현상공모에 당선되어 실제로 지어진 의미 있는 건물의 초기 스터디 모델 사진이었다.
스터디 모델은 건물의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보는 디자인 초기 단계의 작업으로 스티로폼이 주재료인 우드락 보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나는 모델 재료로 골판지를 사용했었다.
이러한 기억을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루페를 가져다 대고 자세히 보기 시작한 순간 내 눈이 확 뜨여졌다. 왜냐하면 화방에서 파는 일반적인 골판지가 아닌 플로터(대형 출력기)에 사용되는 롤 용지가 담겨있던 박스를 재활용하였음을 알려주는 HP(휴렛팩커드)사 로고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루페로 확대해서 보지 않다면, 솔직히 난 그냥 일반 골판지로 만들었다고 기억하고 있을 뻔했다.
이로써 당시 사회초년생이었던 내가 이 작품에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한편,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일찍이 업사이클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이 사진을 꺼내 볼 때면 항상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당시 촬영을 해둔 자신을 셀프 칭찬하게 만들어 주는 나의 소중한 인생 컷이자 타임오브제가 되었다.
확대하면 보이는 것들
요즘같이 디지털카메라나 핸드폰으로 무한대로 찍고 곧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론 누구에게나 손쉽게 공유할 수 있는 디지털 사진과 달리, 슬라이드는 정성스럽게 찍고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완성되는 결과물이자 또 특별한 도구를 통해만 확인할 수 있는 손이 많이 가는 매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나는 이런 아날로그적 메커니즘과 특별함을 가진 타임오브제가 좋다.
대학시절 비싼 필름과 현상 비용에 비해 떨어지는 촬영 실력의 결과물로 인해 친구에게 겉멋 들었다란 소리도 듣기도 하고, 대학 4학년 때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난 그 이후로도 한동안 슬라이드를 찍었다. 당시 찍어둔 사진을 볼 때면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이 든다.
끝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기에 대학 교육과 문화를 접한 세대라는 것에 감사해하며, 조만간 다시 필카에 슬라이드 필름을 장착하고 지금이란 소중한 일상을 찍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