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하는 습관’
"여성은 내내 수백만 년 동안 방 안에 앉아 있었고, 그리하여 지금까지 그 모든 벽들에는 그들의 창조력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력들은 벽돌과 회반죽이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을 넘었으므로, 이제는 펜과 붓과 사업과 정치에 쓰일 필요가 있습니다."
-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연극을 전공하는 4년 동안 여성이 쓴 희곡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걸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으며 깨달았다.
불과 300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자신의 글을 쓰기 위해서 남성의 이름을 빌려야 했거나,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대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과거에 처절히 바라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여성들이 목숨까지 내어놓으며 싸웠던 그 투쟁의 역사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남성을 내조하는 보조적 도구로서 여성을 바라보던 시대적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용감하게 써 내려간 샬롯 브론테,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와 루시 모드 몽고메리에게 우리들은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여성이 철저히 남성을 통해서만 비춰졌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여성들은 남성을 빌리지 않고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에 와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엄마인 여성들이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여전히, 여전히 어렵다.
그럼에도 위로가 되었던 것은 (주로 남성 예술가의 습관을 다루었던) 베스트셀러 '리추얼'을 쓴 메이슨 커리가 여성 예술가만 다루어 발간한 책 '예술하는 습관'에서 엄마로 살며 위대한 예술가가 된 여성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아이를 돌보며,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을까?
"이런 말을 하기는 아주 쉽죠. “음, 오늘 일진이 나빠. 아이들은 말을 잘 안 듣고, 부엌은 문질러 닦아야 하고. 하지만 내일은 더 나을지도 몰라.” 다음 주나 아이들이 좀 더 크고 나면 더 나을 거야라고 자신을 다독일지도 모르죠. 그러다가 결국에는 손을 놓고 말아요. 방해를 받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을 놓지 않으면 저 이면에서 아이디어를 키워나갈 수 있죠. 사실은 그게 훨씬 더 빨리 성숙해지는 길이에요. 조각할 시간은 적어질지 몰라도 항상 조각을 했던 것처럼 그와 똑같은 비율로 성숙해질 수 있죠."
- 바버라 헵워스(1903~1975), 영국 현대 조각가
겨우 2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경험해본 결과, 엄마의 스케줄은 온전히 아이의 컨디션에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가 어릴 땐 더욱 그렇고, 아이가 여러 명일 경우 원하는 대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런 와중에 '방해를 받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한 영국 현대 조각을 대표하는 바버라 헵워스는 자신의 창작 습관으로 매일 단 10분이라도 하는 것을 얘기했다. 미루지 않고, 매일 조금씩이라도 한다면 예술가로서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헵워스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예술가가 되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일을 했고, 아이들은 먼지와 물감, 그 모든 것이 날리는 한가운데서 자랐죠. 아이들은 그 생활의 일부였어요. 열심히 하는 게 답이에요."
바버라 헵워스 - '유럽예술산책 : ‘본 것’을 그리기보다 몸으로 ‘느낀’ 것을 그린 작가' (경향신문)
"예전에 머레투는 훨씬 더 오랫동안 일했지만 아이를 갖고 나서 실제로 더욱 생산적으로 일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제 시간을 훨씬 현명하게,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요. 시간을 많이 낭비하지 않아요."
- 줄리 머레투(1970~), 미국 건축적 추상회화가
아이를 낳고 시간을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됐다는 줄리 머레투의 말에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출산과 육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기회였다.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도록 극단까지 나를 밀어붙였고, 아이를 돌보고 회사 업무를 하며 집안일을 하고 그와 동시에 글을 조금이라도 쓰기 위해서는 주어진 모든 시간에서 최고의 효율을 추구해야 했다.
엄마로서의 삶에 비추어 엄마가 아닌 자연인인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뚜렷이 보였다. 멍 때리던 출퇴근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하고 싶은 일을 잘하는 일로 만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아이 낳기 전엔 생각에도 없던 이직도 몇 차례 시도했다.
절대적인 시간은 돌볼 아이가 없는 사람에 비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시간 활용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줄리 머레투도 같은 것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지금 전 세계 미술시장에서 명성을 날리는 멋진 예술가다.
"단편소설은 이동하면서도 쓸 수 있었다. 운전하면서 농산물 직판장으로 가는 길에도 머릿속으로 소설의 기본적인 윤곽을 잡고, 항공사의 전화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대사를 쓰고, 딸아이의 당근 케이크를 만들면서 핵심 장면을 대략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한밤중에 초고를 완성하고, 세탁기를 돌리면서 편집하고, 집회 전단지를 인쇄하면서 원고를 복사했다."
- 토니 케이드 밤바라(1939~1995), 미국 작가이자 사회운동가, 대학교수, 다큐멘터리 감독
아이를 재우는 건 퇴근이 늦은 나의 역할인데, 부끄럽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생각한 시간에 잠들지 않거나 완전히 잠드는 데까지 1시간 이상 걸리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유일하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쓸 수 있는 나의 밤 시간을 침해당하는 것 같아서 그랬다.
* 한때 분노를 이기지 못해 노트에 소리 지르는 시간을 기록한 글, '화가 나면 필사를 하는 이유'
워킹맘 부트캠프에서 이 얘길 했더니, 함께 부트캠프에 참여하고 있던 워킹맘 선배 한 분이 "저는 애들 재울 때 오디오북 들어요."라는 말을 하셨다. (그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매주 글을 한 편씩 써서 발행하기로 한 요즘은 아이와 침대에 누워 '상어가족'과 '나비야', '작은 별'을 함께 부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글감과 글의 구조를 생각한다. 덕분에 아이가 원하는 시간에 자지 않아도 전처럼 화가 나지 않는다. (물론 너무 늦게 자면 화가 여전히 납니다. ^ㅠ^)
엄마이자 소설가인 토니 케이드 밤바라도 장을 보러 가는 길에도 머릿속으로 소설의 기본적인 윤곽을 잡았고, 딸을 위한 당근 케이크를 만들면서 핵심 장면을 그렸다.
"노란색 종이 묶음을 한 손에 꽉 움켜쥔 채 하루 종일 아파트 안을 돌아다녔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즉시 쉽게 기록해두려고 종이 묶음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대형 인쇄용지인 풀스캡과 파커 펜, L.C. 스미스 타자기 다수가 집 안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톰슨이 언제 '호기심에 사로잡혀서' 뭔가에 관해 써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도로시 톰슨(1893~1961), 히틀러와의 인터뷰로 명성이 높은 미국 저널리스트
아이를 돌보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출퇴근을 하다가도 뭔가 떠오르면 쓰고 구상할 수 있도록 휴대폰과 소설책과 에세이 한 권씩, 노트와 필기도구를 항상 챙겨 다닌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뭐라도 손에 집히면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것이 창작활동의 중요한 점들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아이를 보모에게 30분 동안 맡겨놓고 제 방에 가서 아무 글이나 막 썼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간이 저에게 정말 필요했네요." 줄라이가 말했다."
- 미란다 줄라이(1974~), 행위예술가, 작가, 영화감독, 배우
매일 단 10분이라도 꾸준히 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언제든 쓰고 구상할 수 있다지만, 예술가에겐 고독의 덩어리 시간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럴 땐, 미란다 줄라이처럼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자.
도움을 요청할 대상이 보모일 수도 있고, 남편이나 부모님일 수도 있고, 기관일 수도 있다. 필요하고 가능하다면 주위의 도움을 받고 자신만의 창작 시간을 가지자.
나 또한 꼭 창작이 아니더라도 자기소개서를 쓰는 등 단타로 완성하기 어려운 글을 쓸 때는 남편과 사전에 일정을 논의하고 아이를 남편에게 온전히 맡긴다.
그러고 나면 아이를 돌볼 마음의 여유와 에너지도 충전되니까!
미란다 줄라이의 대표작 <미 앤 유 앤 에브리원> 인터뷰 (씨네21)
엄마가 예술가가 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각자에게 맞는 돌파구는 분명 있을 것이다. 엄마라는 책임과 역할에 지지 않고,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엄마 사람 예술가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시행착오를 거쳐서 자신의 욕구를 파악하고, 자신에게 양분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본능적인 리듬과 일정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 도리스 레싱,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