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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숲 with IntoBlossom Jul 31. 2023

숨바꼭질,  사라진 그 놀이

<별숲 에세이> 놀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8살 무렵, 하교 후 같은 반 아이들은 삼삼오오 놀이터에 모여 놀이시간을 자주 가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집에서 가져온 포켓몬 카드를 서로 교환하기도 하고, 축구공을 차기도 하고, 얼음땡 같은 잡기 놀이도 하며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아들은 학교 가는 것보다 수업이 끝난 후 친구들이랑 무얼 하며 놀지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런데 유독 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지 않았다. 숨바꼭질은 여러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며 존재할 정도로 흔한 놀이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여간해서 즐기지 않았다. 숨바꼭질은 스스로 술래를 피하 듯 꽁꽁 숨어버렸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한번 모이면 많게는 예닐곱 명 정도였다. 한데 모여 놀기도 했지만 대개 둘셋씩 나뉘어 공놀이를 하거나 개미굴을 쫓아다니며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느 날인가 각자의 놀이에 빠져있었던 때, 한 엄마가 급하게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엄마들끼리 수다에 빠져있는 동안 본인의 아이가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에서 아이가 사라졌다. 나를 포함한 다른 엄마들도 덜컥 놀라 재빨리 눈으로 자신 아이의 위치를 확인하고 사라진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 드디어 그 아이를 발견했다. 놀이터 계단 밑에 있는 화단에서 커다란 나뭇가지를 찾느라고 정신이 팔려있었나 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들은 단지 위쪽 끝에 있는 다른 놀이터까지 아이를 찾아다녔다. 사실 아이는 10미터 근방 안에서 홀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엄마는 야속한 마음에 아들의 등을 꽤나 세게 두드렸지만 정작 아이는 해맑았다. 드디어 제일 크고 멋진 나뭇가지를 발견했다고, 자기가 이제 대장이라면서 어찌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놀란 엄마의 속은 알바 아니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신신당부의 말을 몇 번이나 듣고 아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집으로 급하게 돌아갔다. 남겨진 다른 아이들은 어땠을까? 친구가 사라진 것은 관심 없었다. 그저 그 아이가 찾아낸 큰 나뭇가지를 부러워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리고 자기도 더 멋진 것을 찾겠다며 흥분했다. 그 모습을 본 엄마들은 그만하자고 만류했고 그렇게 그날의 사건은 마무리됐다.


 순간 린드그렌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 떠올랐다. 어른들의 표현으로 '잠시 사라졌던', 아이들의 표현으로 '멋진 대장 나뭇가지를 찾아 탐험했던' 그 아이를 삐삐라고 생각해 봤다. 엄마들의 성화는 들리지 않고 오직 멋지고 큰 나뭇가지를 황홀하게 바라보는 친구들을 토미와 아니카라고 상상해 봤다. 값비싼 진주로 구슬치하는 삐삐에게 나뭇가지와 진주의 가치는 별 차이가 없다. 자신의 동심을 지키는 놀이의 장난감일 뿐이다. 아이들은 신나게 놀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게 태어났다.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그 본능적 가치를 알고 있을까. 아니, 이미 알고 있고 그렇게 하고 싶을 것이다. 다만 놀이를 주저하는 부모들이 있을 뿐이다.


 세상이 험해졌다고 한다. 해가 쨍한 대낮에 CCTV가 곳곳에 있는 대형 아파트 단지 안에서조차 아이가 사라지면 가슴이 철렁해지는 이유다. 엄마들은 아이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상황을 불안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온갖 매스컴은 학교와 집 앞에서 아이가 당한 험한 일을 보도하고, 흉악범들의 뻔뻔한 범죄 사실에 부모들은 몸을 떤다. 한국의 치안은 세계 최고라 자부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꽁꽁 싸매는 불안도 세계 최고가 되었다. 나 역시 그런 엄마 중의 한 명이다.


 사실 나도 유년 시절 아파트에서 자랐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까지 놀고 있으면 엄마가 아파트 복도에서 그만 들어오라고 크게 소리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응답하다 1988]에서 배우 라미란이 "김정환! 밥 먹어! 밥 먹으라니까!"라고 소리치던 장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온갖 흙장난, 풀장난에 얼굴이 시커메질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나를 떠올리며 지금의 내 아이가 너무 멀끔한 것이 아닌가 머쓱한 기분이다. 언제나 물티슈, 물통, 젤리 같은 간식을 에코백에 넣고 아이가 노는 것을 지켜본다. 엄마 없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면 "엄마 어디 계시니?"하고 되레 묻기도 한다. 아이들은 꽁꽁 갇힌 채 놀이한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즐거운 숨바꼭질, 신나는 흙놀이를 맘껏 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일부러 흙을 찾아 숲체험을 따로 하고, 숲유치원과 숲캠프를 예약한다. 이리저리 뛰놀던 미로 같던 골목은 으슥한 우범지대의 표상으로 변해버렸다. 부모 세대인 내가 놀이의 변화가 이리도 아쉬운 것은 그만큼 유년의 놀이에 몰입했던 즐거움이 컸던 탓이다. 땀을 흠뻑 흘릴 정도로, 엄마가 불러도 못 들을 정도로 노는 시간이 과연 내 아이에게 충분했을까. 아쉽고 또 아쉽다. 오히려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된 키즈카페에서 노는 것이 익숙한 내 아들. 이 시대의 숨바꼭질은 어떤 놀이가 되어야 할까.


삐삐는 말한다. "말도 안 돼. 심장이 따뜻하게 뛰고 있는데 왜 춥겠니"라고. 숨바꼭질이 사라진 세대에게 던질 수 있는 의미 있는 한 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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