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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숲 with IntoBlossom Aug 01. 2023

해사한 게으름 중이라면

<별숲 에세이> 나의 글쓰기

나는 배고파서 연기했는데 남들은 극찬하더라.

그래서 예술은 잔인한 거야.

배우는 돈이 필요할 때 연기를 가장 잘해.   


 배우 윤여정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중에게 이미 알려진바, 두 아들의 양육을 위해 어떤 역할이든 마다하지 않고 뛰어든 배우이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 청룡상도 대종상도 아닌 오스카를 거머쥔 윤배우는 힘들지만 인생은 살아볼 만한 재미가 있다고 웃음 지었다. 오래된 칭송은 길고 긴 과정을 동반한다. 빈 쌀독을 바라보며 홀로 양육을 책임져야 했던 싱글맘의 모습에서부터 그 칭송의 여정은 시작됐다. 대중이 결말에만 관심 있을지라도 윤배우가 지난날에 대해 마치 옛 소일담을 나누 듯 말할 수 있는 여유는 어떠한 아쉬움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 토해낸 자는 후회가 없어 보인다. 만약 그녀가 이혼의 아픔을 겪지 않고, 평범한 주부로서의 일상을 살았다면 과연 지금의 대배우가 되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의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연대기에 '이처럼 극적인 드라마는 연출되지 않는다'에 좀 더 마음이 기운다. 그녀의 인생은 인터뷰의 말처럼 잔인하기에 더욱 빛이 난다.





내 꿈에 처음부터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열예닐곱 살 때 이미 그것을 알았고

글만 써서 먹고살 수 있으리라는

허황한 생각에 빠진 적도 없었다.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작가 폴 오스터의 자전적 에세이 [빵 굽는 타자기]를 읽다 보니 '이 사람 정말 쓰고 싶은 말은 다 하는군' 싶었다. 내게 생업 작가의 길은 아직 생경하지만,  오스터의 글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고단한 시간인지 가늠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기꺼이 내 맞아주마'라며 작가 생활을 시작했겠다만 결혼과 아이의 출산은 곧 그를 생계의 덫에 허덕이게 한다. 일단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쓴 오스터에게 자존심을 따질 여유는 없었다. 강렬한 눈빛과 꼿꼿해 보이는 그의 인상이 계속 떠올랐다. 보이는 이미지에 비해 참 의외라는 생각을 계속 품으며 그의 책을 읽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는 살림에 역시 작가란 신들의 호의가 없다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고 오스터는 자조했다. 이 책의 원제목은 [Hand to Mouth]로 하루 벌어 근근이 먹고 산다는 뜻이다. 번역 제목도 최고지 않은가. [빵 굽는 타자기]라니. 나란 사람은 소위 글 좀 쓴다고 속으로 으스대면서 깨끗하기 그지없는 책 표지 사진만 올리면서 몇 글자 끄적대지 않았는가. 보기 좋은 해사한 게으름 앞에 밥 짓는 키보드를 두드릴 만큼 글씨기의 치열함을 경험하지 않았다. 때문에 폴 오스터의 처절했던 지난 경험은 내게 경고인 동시에 자극이다.   




김장성 글, 유리그림. 이야기꽃.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씨를 심어야 한다.

   .

   .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 싹을 틔워야 한다.

   .

   .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 줄기를 키워야 한다.

   .

   한 시절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이다.  


 


 농부가 있다. 황갈색의 마디마디 주름이 숫소의 쟁기질 지나간 밭고랑과 다를 바 없이 깊게 파여 있다. 씨 부리기 전 힘차게 엎어진 황토의 내음에 늙은 농부가 그간 흘린 땀냄새가 고스란히 묻혀있는 듯하다. 벌써 몇 년 째인지 횟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농부는 담담히 책을 바라보는 독자에게 한 마디 뱉는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씨를 심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다. 씨를 심고 싹을 틔우고 줄기를 키워야 한다. 머리로 알고 있는 그 상식을 농부는 구태여 또박또박 되풀이한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이라고. 수박을 먹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마트에 가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작가 김장성은 농부의 목소리를 빌어 말한다. 그 안에는 수박이라는 작물, 작물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한 농부의 오랜 품과 애씀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앞 서 말한 윤여정 배우가 생계를 위해, 폴 오스터가 신의 호의에 마지않는 작가가 되기 위해 달려온 것처럼 농부에게도 땅을 품은 마음이 있다. 그림책 [수박이 먹고 싶으면]을 찬찬히 되풀이해 읽다 보면 성실함을 이길 자가 누가 있겠는가 싶다. 그리고 그 결실이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준다. 윤 배우의 연기를 보며 대중의 마음이 움직이고, 폴 오스터의 글에서 독자들이 힘을 얻듯이, 수박 한 덩어리 수확하며 내 한 시절을 고스란히 돌려받는 것이 아닌 돌려'주는' 것이라 표현한 작가의 말이 계속 박혀 새겨진다. 부단한 노력 끝에는 나눔이 기다리고 있나 보다.




글을 쓰려는 사람들은 어쩌면 어딘가 불행한 사람들이다.

행복한 사람은 대체로 글을 쓰려하지 않는다.

외로운 사람, 고통 안에 있는 사람,

상처받은 사람만이 무언가를 애써 글로 토해낸다.


 작가 손화신의 에세이 [쓸수록 나는 내가 된다]의 머리말 첫 문장이다. 그래 맞아. 나의 글쓰기를 이렇게 시작되었지. 약간은 우울한 마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지. 속마음을 들킨 듯 얼굴이 붉어졌다. 그림책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 후, 나를 드러내지 못한 답답함과 열망이 계속 글을 쓰게 만들었다. 한때 말하는 것보다 글쓰기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참 건방졌던 나다. 이렇듯 글을 쓴다는 건 나조차 깨닫지 못했던 내 안의 부끄러운 민낯을 수없이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다. 꼭 상처를 토해내는 방법이 글쓰기 밖에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핵심은 상처를 털어내는 과정의 깊이에 있다. 볼 것이 많은 세상이기에 정작 한 사람마다의 이야기를 진득이 들어주는 시간이 부족한 요즘이다. 챙겨들을 음악도 많고 보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도 많다. 하루의 시간 동안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스스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도 부족하다. 글쓰기는 책과 더불어 그런 공간과 시간을 내게 선물했다. 글쓰기와 책은 내가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는 공간, 천천히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싶은 시간을 허락했다. 다 그 안에 있었다. 누구에게 꺼내놓기 낯 뜨거운 일기 같은 글일지라도 괜찮았다. 토해내 듯 힘들지만, 곧 편안해진다. 그렇다. 난 아직 토해낸다. 그림책 [수박이 먹고 싶으면]의 농부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글을 쓰지 못한다. 아직 난 한 시절을 고스란히 나에게 돌려받고 있다. 언젠가 돌려주게 될 시간을 기대하면서.  

 



 작가는 불행한 존재일까. 예술은 잔인한 것인가. 그렇다고 말하는 이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숨이 끊어질 듯 헉헉대며 올라가는 등산가이다. 내려갈 수 없는 외길에 놓여있고 올라갈수록 산소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올라간다. 그리고 결국 편안한 정상에 다다른다. 까칠하게 일어난 붉은 피부가 가라앉기도 전에 냉수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운해를 바라보며 말할 것이다. "예술은 잔인한 거야." "작가가 되는 것은 선택되는 것이야." "글은 어딘가 불행한 사람이 쓰는 거지."라고 말이다. 올라가는 도중에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 말할 자격이 있다. 이 과정이 회를 거듭하며 인이 박히게 되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한 시절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이다"라고. 그들은 그리 말할 자격이 있다.  


 프로 작가가 지망생들에게 하는 한결같은 말이 있다. 바로 "계속 써라"이다. 결국 꾸준함 앞에 장사가 없는 건 글쓰기도 예외가 아니다.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친구와 대화하며 스스로 정리가 되듯, 글쓰기도 내 거지 같은 활자들을 두드리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다 보면 정리가 된다. Backspace를 누르는 일보다 Enter를 쭉쭉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길 바란다. 결국 해결의 통로는 미로 속 갈라진 수많은 길을 왔다 갔다 하며 자신도 모르게 깨닫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지루하고 앞이 안 보이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미련한 글쓰기의 시간은 소중하다.


 글 쓴다는 것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세워본다. 보기 좋은 해사한 게으름의 글쓰기보다 땀이 나는 치열함의 글을 쓰고 싶다. 내 속으로 파고들수록 그 안의 글쓰기 세상은 넓어질 거라 믿고 가는 것. 누가 알아줄까마는 괜찮다. 뱉어내고 뱉어내다 보면 자신이 만든 미로 안에 갇혔다 탈출한 다이달로스처럼 날개를 달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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