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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별연두 Jul 02. 2019

노인은 패배하지 않았다.

‘노인과 바다’ 를 읽고

작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블로그에 조각 글을 올리면 스트레스가 좀 풀리고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지인의 권유로 시작한 글쓰기였지만 하면 할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데 시간을 할애하면 할수록 남편의 불만이 커져갔다. 주말에도 걸핏하면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것이 못마땅했던 그가 급기야 막말을 내뱉었다. 


“내가 봤을 때 넌 언어영역은 꽝이야. 그런다고 글이 써지냐?”


남편의 말에 동공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리를 꽥 질러주었지만, 이미 마음엔 생채기가 났다.


‘노인과 바다’는 참 오랜만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 때, 삐뚜름하게 책상 의자에 앉아 ‘노인과 바다’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뿐, 별다른 감흥이 없어 이후 다시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거의 25년이 지나 독서모임을 하면서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게 이런 내용이었어?’라며 사뭇 놀랐다. 


Photo by Sean O. on Unsplash


그러나 사십 일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그에게 이제 노인이 누가 뭐래도 틀림없이 ‘살라오’가 되었다고 말했다. '살라오‘란 스페인 말로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p.15) 여든 이레 동안이나 고기를 낚아 올리지 못한 산티아고 노인이 소년과 함께 ‘테라스’에 들어가자 많은 어부들이 노인을 놀려댔다. 하지만 노인은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시답지 않게 떠드는 이야기가 자신의 인생에서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소신뿐이었다. 또 하나가 더 있다면, 그를 살뜰히 챙기는 소년 정도였을까? 오래전, 자신보다 몸집이 큰 검둥이와 팔씨름을 할 때, 이틀 밤낮을 꼬박 새워가며 승리를 거뒀던 산티아고 노인에게 그런 야유는 우스울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문득 뒤를 돌아보니 뭍이 보이지 않았다. 뭍이 보이지 않아서 어떻단 말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p.46) 노인은 홀로 고기를 쫓아 뭍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라며 자신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했다. 나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위태한 상황이 오면 한 걸음 물러서고 나중을 기하는 편이었다. 남편은 ‘일과 육아만으로도 위태위태하면서 글쓰기가 웬 말이냐’고 했다. 난 그의 말에 한발 물러설 듯 말 듯 물러서지 않았다. 글쓰기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스포츠 선수들이 시합 전, 음악을 들으며 안정을 취하는 모습이 종종 카메라에 포착되고는 한다. 글쓰기는 일과 육아에 치이고 있는 나에게 안정을 가져다주는 음악과 같다. 그래서 나는 이번만큼은 ‘글쓰기를 그만두라’는 그의 말에 ‘좀 위태로우면 어떻단 말이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Photo by Sean O. on Unsplash


바로 그때 낚싯줄이 세차게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고, 왼손에 쥐가 났다. 무거운 줄을 꽉 쥐고 있는 손이 뻣뻣하게 오그라들자 그는 혐오스러운 듯 그 손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의 손이람. 쥐가 날 테면 나라지. 매 발톱처럼 어디 오그라들어 봐.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그가 말했다. (p.56) 나는 글쓰기를 놓을 수 없다. 노인이 왼손에 쥐가 나는 상황에서도 고기를 놓아줄 수 없듯이 말이다. 노인의 고기처럼 글쓰기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것일지라도 내 필력이 좀 모자랄지라도 글을 쓰고 싶다. 한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만큼이나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그건 좀 아니지 않아?" "하지마" 라고 하면 순순히(?) 그렇게 했다. 사람관계에서 갈등을 싫어하는 성향탓도 있었을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하며 고집부리고 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면서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지만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삶이 의미가 있게 되었다. 작은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남들이 뭐라해도 지켜야 하는 소신(?)같은 것들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십 대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 모든 것이 허무할 뿐이라고 믿었던 내가 갑자기 바뀔 수는 없었다. 글을 쓰면서 이를 통해 삶의 부분 부분에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을 들이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고 느꼈다.


“한낱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p.95) 노인은 뚝심으로 세상을 마주했다. 상상 그 이상으로 거대한 고기를 뚝심 하나로 낚아 올렸다. 그는 파멸에 이를지언정 그 거대한 고기에게 패배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조금 가난해도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었어도 그의 마음은 강철로 만든 대문과 같다.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이 생기면서 지켜야 할 소신들이 많이 생겼다. '남편이 아무리 철없는 소리를 해도 아들 앞에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  '남편의 죄는 미워하되 남편 자체는 사랑하자.', '아들래미 교육은 남들눈치 안보고 느림보 교육으로 간다.' 등등 소소하지만 중요한 내 삶의 신조가 생겼다. 이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나를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며 소확행을 만들어가는 데에는 글만한게 없다. 생각이 글이 되면 좀 더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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