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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봉주 Aug 01. 2021

이해와 해체

덤불 프로젝트: 2021 청년예술 프로젝트 1차 전시

 2021년 7월 17일부터 23일까지 성남청년예술창작소에서 진행한 덤불 프로젝트 '2021 청년예술프로젝트 1차 전시'에 대한 글로, 7월 25일에 작성되었습니다.

 이해(理解)와 해체(解體)는 모두 풀 해(解)를 쓰지만 대상을 대하는 위상이 다릅니다. 이해는 조망하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 눈’에 보기 위해서 일부러 거리를 둡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객관화’라고 합니다. 대상만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 사태, 사건과도 거리를 둡니다. 명백히 자신은 그곳에 참여하지 않는 ‘이방인’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고요히 온전한 상태에서 공통된 이치(理)를 풀어(解) 내는데 집중합니다.


 하지만 해체는 몸(體)을 풀어냅니다. 풀어내는 몸은 자신이 될 수도 있고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도 공통된 이치를 풀어내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지점은 몸을 풀어낸다는 것은 더 이상 객관적으로 상황을 관망하는 상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황, 사태, 사건 안으로 들어가야 ‘몸’을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대상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해체’된 대상은 ‘해체’되는 순간 ‘나’도 ‘해체’합니다. 대상을 뒤집는 과정은 자신에 대한 내적 탐구를 촉발시켜 ‘나’ 역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도 상황, 사태, 사건에 ‘참여’하고 편입됩니다. 참여하고 편입되었다는 것은 ‘나’ 또한 대상, 혹은 ‘나’보다 더 큰 수준의 ‘대상’에게 ‘해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유하는> : ‘이해’를 통해 스스로를 ‘소외’시킨 인간이 행하는 자기 '해체’


부유하는_신혜승_8min 8sec_dimaensions variable_2021 (사진: 홍예지)


 정말 인간은 ‘기생’하고, 식물은 ‘자생’하는가? 그리고 이 둘은 ‘상생’하는가. ‘기생’과 ‘자생’의 사전적 정의상 ‘상생’은 모순이 있습니다. ‘기생’은 숙주를 희생시키면서 소비하여 죽입니다. ‘자생’은 스스로(自) 삽니다(生). 따라서 서로 살 수 없거나[기생] 서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자생]. 이러한 해석은 '이해'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생과 식물의 자생 양단의 상생은 인간을 '인간'적 성격과 '동물'적 성격으로 나눠보고(해체), '식물'을 '개체'적 관점이 아닌 '종'적 '자연 체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타당합니다(참여).

 

 3억 년 전 식물은, ‘자연’이라고 하는 것에 물리적인 힘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더 복잡한 종이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듭니다’. 식물은 ‘자연’이라는 체계의 한 축이면 ‘자연 자체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종적 차원에서 식물은 시스템 자체로 ‘자생’하며 산소호흡과 광합성을 반복하여 원인과 결과가 양방향으로 통과합니다.

 

 동물의 인과는 일방향이지만, 자연에 역동성을 부여하여 변수 창출을 통한 변화의 다양성을 촉발합니다. 대신 인간은 자연의 체계에서 스스로 탈출하여 자신의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문명은 무(無)에서 유(有)로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자연에서 빌려와 ‘소모’합니다. ‘기생’입니다. 자연에서 벗어나 ‘이해’하려고만 하며, 자연에 참여하지 않아 소외되었습니다.

 

 그래서 좌, 우, 뒤 세 방향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탈출한 시스템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 인간을 시스템 안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해체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공포를 느끼는 것을 보면 아직 해체될 용기가 나지 않는가 봅니다.




 <세워지고 무너지는> : ‘이해’는 부족하고 ‘해체’는 무섭다.


세워지고 무너지는_김미루_water pen on tracing paper_2021 (사진: 홍예지)

 

 이야기가 모호하고 몽롱하며 미묘합니다. 명확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해’는 부족한 태도가 되었습니다. 높은 곳에 있던 인간은 자신이 원래 서있던 사태와 상황과 사건으로 내려옵니다. 하염없이 내려옵니다. 너무 내려가다 보니 무의식까지 내려온 것만 같습니다. 몽롱한 것이 꿈인 것만 같습니다.

 

 나아가 이제는 ‘자기’와 ‘진실’마저 모호해집니다. 무엇이 ‘자기’이고, 무엇이 ‘진실’인지요.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자기’와 ‘진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해’의 층위에선 명백한 줄 알았던 모든 것이 모호해지는 상태. 이것은 ‘이해’의 높이에서 내려와 ‘자기’가 ‘해체’되기 시작하며 사태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신체마저 분해됩니다. 하다못해 시간마저 붕괴됩니다. 상황의 선형적인 시간 흐름도 큰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사마귀가 곤충을 잡아먹는 모습을 손바닥 위에서 관찰합니다(이해). 그 광경에서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이내 사마귀는 인간을 잡아먹습니다. 위치에서 내려온 인간이 상황에 참여함과 동시에 해체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해체되기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해’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려 합니다. 온전히 ‘해체’되어 ‘참여’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상황과 사태에 의아함을 가집니다. 그때 암사자 한 마리가 등장합니다. 암사자에 대해선 <세워지고 무너지는>에서 깊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00 Hours = 00:00:00> : ‘이해’를 ‘해체’하기


00Hours = 00:00:00_김예솔_paper_variable size_2021 (사진: 홍예지)

 

 인간이 자연을 높은 곳에서 관망하며 ‘이해’ 하기 위해서는 자연보다 크고 높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인간은 자연보다 클 수 없고, 높을 수 없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높게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한눈에 전부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관념적으로는 ‘언어’이고, 기술적으로는 ‘종이’입니다.

 

 종이의 등장. 인간은 자신만의 지적 놀이터를 획득합니다. 무엇이든 그릴 수 있고, 무엇이든 적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대상도, 높은 대상도 이 종이 안에 자기가 원하는 만큼 작고 자세하게 담을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도 대상을 관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 종이에 담긴 ‘이해’는 전승됩니다. 인간의 '이해'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종’적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이 ‘인류’로 진화하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종이에 그려진 ‘이해’는 ‘진실’이 아닙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재단하고 구겨 넣은 사실로 구성된 이야기는, 이미 ‘진실’을 벗어납니다. 이를 깨달은 학자가 ‘이해’를 ‘해체’하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재단하며 인류는 스스로를 ‘진실’에서 소외시켰습니다. 학자는 종이를 오른쪽에서 왼쪽, 왼쪽에서 오른쪽, 위에서 아래, 아래에서 위로 찢으며 ‘인류’의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소회 합니다. 문명사 최초의 ‘반성적 해체’.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찢어 ‘해체’되며 진실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무제> : ‘해체’ 되지 못한 ‘이방인’을 환영하는 ‘저릿함’


무제_김미루_soft pastel on paper_2020 (사진: 홍예지)

 

 그러나 암사자가 보기엔 해체를 시도하는 우리의 모습은 부족하기만 합니다. 우리를 또렷이 응시하는 암사자는 우리를 결코 사냥감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편하게 솟은 어깨는 우리를 전혀 경계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은 시선은 우리를 가까이서 관찰하려는 호기심 어린 눈빛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오금과 뒷골이 저릿하며 얼어버립니다.

 

 ‘이방인’을 보는 눈빛에 특징이 있다면, 지나치게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니, 숨길 것도, 숨길 필요도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무엇을 숨겨야 할지 모르기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편합니다. 소통의 선전포고입니다. 암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며 적나라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정체를 밝히기를 요구합니다. ‘해체’되어 ‘참여’ 하지 않는 ‘당신’이 누구냐고 물어봅니다.


 해체되어 찢어 발겨지는 것이 아직은 두려운 우리는 도망칩니다. 소통을 제안한 암사자는 우리에게 참여를 강제하며 허벅지를 물어버립니다. 그러나 뜯어 ‘해체’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수백 개의 바늘은 남깁니다. 좁은 허벅지에 ‘참여’를 위한 ‘해체’가 얼마나 섬세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아직 ‘이해’의 버릇을 버리지 못한 저는 암사자가 선물한 수백 개의 바늘에 담긴 ‘해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만 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느낍니다.



/ 주최: 성남문화재단 청년예술창작소 (https://www.instagram.com/snart_studio/)

/ 주관: 덤불 (https://www.instagram.com/dum_bul_/ )

/ 사진출처: 홍예지 (https://www.instagram.com/yeji_cu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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