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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봉주 Aug 20. 2021

자정에 점심을 먹는 인쇄소에서

지식산업은 육체노동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

 "곧 저희 점심시간이에요."

   

인쇄소에서 이 말을 들은 시간은 자정이었습니다. 




 어두운 밤의 12시. 해가 진 후에 시침이 '12'를 가리키고 있는 시간인 '자정子正'이라는 단어는 일상어보다는 문학적인 표현처럼 느껴집니다. 어딘가 친숙하기보다는, 분위기가 있는 단어로 느껴집니다. 일상에서 '자정子正'이라는 단어는 잘 쓰이지 않는데, 막상 단어를 쓰지 않고 밤 12시를 이야기할 때, 이 시간을 헷갈리지 않게 이야기하는데 애를 먹습니다. 


 흔히 낮의 12시인 정오正午를 기준 삼아 '오전'과 '오후'로 시간을 나눕니다. 그러나 이 기준에서는 시간이 양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밤의 12시에서 마주치기 때문에, 밤의 12시는 '오전 12시'인지 '오후 12시'인지 애매해집니다. 시간을 24 등분하여 지목하는 방법으로도 이야기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가고 있는 날을 기준으로 하면 24시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데, 오고 있는 날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시작하는 시간인 0시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분명 존재하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명쾌하지 않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이 거의 언급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름 짓기'에 힘을 쓸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밤 12시'는 그런 시간입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명명하는 명확한 표현이 없음에도, 굳이 이 시간에 이름을 명확히 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고, 그나마 있는 '자정子正'이라는 단어마저 '문학적 표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밤 12시입니다.




 처음 인쇄소를 들렀습니다. 생각을 단어에 담고, 생각이 담긴 단어를 엮어 문장을 만든 후, 그 문장을 쌓아 쓰인 글이 구현이 되는 곳입니다. 쓰고, 말하며 기껏 해봤자 문서 파일로 남기는 것이 전부였던 제가, 글이 질감과 모양을 가지고 손으로 잡히게 구현되는 인쇄소에 들른 일은, 제가 나아가고 싶은 다음 단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저에게 인쇄소에서 글이 뽑아져 나오는 광경은 진한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곧 자정子正이 되는 때에, 사장님께서 "곧 저희 점심시간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점심?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낮 12시'가 아니라 '밤 12시'에 '점심'이라니요. 새삼 점심의 의미를 확인하면 '하루 중에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는, 정오부터 반나절까지의 동안', '그때에 먹는 끼니'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표준국어대사전).




 제가 방문한 인쇄소는 24시간 운영되는 곳입니다. 대부분 적어도 수년 이상의 경력을 가지신 분들일 것입니다. 현장에서 오랜 시간 필요한 언어와 표현을 형성해 오셨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숙련된 동료분들과 정리된 일정을 구축해 오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근무하는 때에 밤 12시는 그분들에게 있어서 낮의 12시로 일컬어지는 점심이나 다름없는 시간으로 자리 잡혔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으나, 특정 장소나 시대, 세대나 집단에서 만들어진, 그들만이 공유하는 표현인 '은어'가 발생합니다. '은어'의 등장 배경은 간단합니다. '특정 언어 집단'에게는 필요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필요하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은 단어를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특정 언어 집단'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즉, 24시간 운영되며 자정의 노동 경험이 쌓여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은어가 새로운 표현이나 언어일 필요는 없습니다. 유사한 단어나 표현에서 약간 비틀거나 차용해오기도 합니다.)



 

 저는 앞서, 일반적인 표현이 없는 이유는 그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명칭을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나아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표현에 잦은 쓰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일정을 보내다가 어느새 밤 12시가 되지 않는 이상, 밤 12시에 약속을 잡고 일정을 보내지 않습니다. 밤 12시에 일정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은 밤 12시의 일정이라기보다 하루를 시작하는 것과 함께하는 일정으로 생각하며 계획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정상에 유의미한 지점을 정한 적 없었던 '자정子正', '밤 12시'가 누군가에게는 꾸준한 일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음을 목격했습니다.




 밤새워 문장을 쌓아도, 약품 냄새가 진동하고, 기계소리가 말소리를 잡아먹는 작업장에서 '자정'에 '점심'을 먹으며 인쇄하는 현장의 기술자분들이 없으면 글은 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합니다. 현자의 깨달음이 흙으로 흩어지지 않고, 귀한 통찰이 옅어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일반의 일상'이 붕괴된 노동이 있기에 가능했고,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문장이 도달할 수 있기 위해서도 '일반의 의미'가 주저앉아 변형될 정도로 길고 고집스러운 현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목격합니다.


  지식산업은 육체노동 없이 존속할 수 없었고, 모든 지적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면서 전방위적으로 '육체노동의 존재'를 기만하고 있습니다. 노동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고, 노동이 존재하지 않을 때가 없는데, 우리는 시시때때로 틈만 나면 노동의 존재를 잊습니다. 지식산업이 발달하고, 기술체계가 발전하면서 노동은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 같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노동은 모든 것이 작동 가능하게 하는 동력으로 기능합니다. 


 지식산업이 육체노동의 존재를 부정하는 착각을 형성하는데 크게 일조한 단어는 '자동화'입니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자동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공정에서 노동력은 최소화되고, 인간은 단순 반복 노동에서 해방되었다고 오판합니다. 마치 기계가 재료의 조달부터 생산까지 모든 과정에서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필요하지 않은 마법을 부려 24시간 생산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가지지만, 이 환상은 '자동화' 뒤에 가려진 필수불가결한 육체노동을 배제하게 합니다.


  '자동화'는 오로지 '생산의 입장'만을 설명하며 '노동의 입장'을 대변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많은 생산과정에서 기계가 도입되어 상당량의 노동'력力'이 절약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노동'자者'가 불필요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동화'로 인해 휴식이 불필요한 '동력'이 존재해 공장은 단 한순간도 쉬지 않을 수 있으나, 그 덕에 '노동자'는 단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공장에 붙들리게 되었습니다. 기계는 생산의 대부분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과정에서 사람의 관리가 필요하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24시간 동안 공장은 회전하며 노동자를 요구합니다. '24시간의 생산'이 '24시간의 노동'을 탄생시키는 지점입니다. 


 마치 기계가 노동을 대체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기계가 제공하는 것은 '동력'일 뿐, 어떤 노동도 하지 않습니다. 기계는 생산물을 분별없이 뱉어냅니다. 그저 설정된 것에 따라 '작동作動'할 뿐입니다. 기계는 '무심無心'합니다. 어떠한 의도도 가지지 않습니다. '작동作動'에는 어떤 현장의 맥락도, 개체적 서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동作動'할 뿐 '노동勞動'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노동勞動'의 '노勞'에는 '고단함'의 의미도 포함되지만, 이 역시 너무나 쉽게 간과됩니다. '고단함'은 '일함'과 '쉼'을 구분하여, 현장에 시간의 구분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집단의 시간적 맥락을 형성하며, 개인에게는 '노동'이 개체적인 서사를 만들어내는 바탕이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현장에서 발생하는 '노동의 서사'가 특정 집단의 경험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옵니다. 자신이 가진 '노동력'의 맥락의 차이에 따라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협상하는 과정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밤 12시'에 먹는 밥을 '점심'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지식산업의 존속이 가능하게 24시간 쉬지 않고 존재해 온 '노동'을 보여주는 현장의 역사입니다. 




 '쌀'을 가리키는 한자인 '미米'의 모양은, 벼가 싹을 틔워, 가을에 익고, 재배되기 위해서는 농부의 손을 적어도 88八十八번은 거쳐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식산업의 결실이 아이디어를 거쳐 실물로 출판이 이루어지는데 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과정에서 개입하는 수많은 관계자들의 참여를 생각하면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의 '노동력'을 제외하더라도, 책 한 권이 나오는데 까지 시간 대비 쌀보다 더 많은 손을 거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식산업은 육체노동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요. 지식산업이 빚지고 있는 육체노동의 현장에서, 수많은 개혁적 아이디어를 외치는 실물을 만지면서 수십 년 동안 제대로 된 의자 하나 없는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동자에게 그를 스친 수많은 지식들은, 그 노동을 얼마나 고려했는지요. 적어도 오늘만큼은 '낮 12시'에 '점심을 먹고, '밤 12시'에 글을 쓰면서, '밤 12시'에 '점심'을 먹고, '낮 12시'에 잠들었을 스러지지 않은 육체노동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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