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봉주 Dec 31. 2021

중요한 것은 '눈사람'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폭력, 그 자체의 맥락을 이야기하기

 겨울이 되어 눈이 한참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나이 상관없이 장갑을 끼고 눈사람을 만듭니다. 눈사람을 만드는 그 광경 자체가 너무나 신이 나고 기분이 좋습니다. 오돌오돌 떨리는 겨울이지만, 손이 시린지도 모른 체 눈뭉치를 굴리고 있는 모습은, 굴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까지 천진난만하게 만듭니다. 요즘에는 오리나 작은 눈사람 모양으로 눈사람을 찍어낼 수 있는 장난감도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이 장인 정신을 발휘하며 눈사람 만들기를 즐깁니다.


 하지만 눈사람을 만드는 풍경 한편에서 꼭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드는 행동들이 등장합니다. 누군가가 즐겁게 만드는 눈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파괴하는 행동입니다. 항상 있는 행동이었으나, 이는  1월 '대전대 엘사 눈사람 사건'과 함께 가수 이적 씨가 눈사람에 대한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글을 게시하면서 사회적인 담론이 됩니다.




 누군가가 열심히 만들었을 눈사람을 부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대부분 '눈사람을 굳이 부수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를 문제라고 할 것이 있냐'며 의아해합니다. 어떤 이들은 '눈사람을 부수는 것 정도로 폭력성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며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눈사람에 대한 폭력'은 한 번쯤 이야기해 볼 만한, 생각보다 중한 사건입니다. 대상이 눈사람이 되었을 뿐, 이는 명백히 '폭력'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사람을 부수는 행위'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상이 '눈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폭력을 휘둘러 파괴하지 않더라도 날이 따듯해지면 자연스레 녹아 없어질 장난이니, 그것을 부수는 일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상이 '눈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맥락 없는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은 상당히 고민해봐야 할 부분입니다.




 폭력성은 기본적으로 '대화 의지의 부재 혹은 거부', '공감 능력 부재 혹은 거부', '물리적 억압 및 직접적 상해 의도', '독단적 의지 강제'의 총합입니다. 따라서 맥락에 따라 언제든 발생 가능한 현상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선택적으로 발휘하는 수단에 가깝습니다. 나아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폭력을 당한 대상이 폭력을 당하기 전에 어떠한 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폭력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물론, 방어의 목적은 제외합니다.). 폭력을 가할 수 있는 누군가는, 이미 대상에게 위력의 차원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그런 의도를 통해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상대와 평등한 상태에서 교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맥락 없는 폭력'입니다. 눈사람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었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릅니다. 그 눈사람을 보고 이유 모를 분노를 느껴서 파괴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저 아무 맥락 없이 그것을 파괴하고자 폭력을 휘두른 것입니다. 폭력과 파괴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대상의 존재를 자신의 의도적이고 물리적 힘으로 해체하여 부정'하는 두 가지 사고가 공존합니다. 즉, 무언가를 특정 지어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기 앞서 '어떤 존재로 인정'했다는 것이 전제됩니다. 즉, 눈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람은, 눈사람이 별 것도 아니어서 무신경하게 툭하고 친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명백하게 인지하고 행동에 돌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상이 눈사람이라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 맥락 없이 자신이 인지한 무언가에 대해 명백한 파괴 의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사람에게 폭력을 발휘한 사람은, 눈사람이니까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발휘한 것(물론 이 경우도 끔찍하지만)이 아니라, 폭력을 발휘할 만큼 만만하고 자신이 손해보지 않을 상대를 찾아다녔던 것입니다. 언제든 (자신이 명백히 위력적인 관계에 위치해 있기에 쉽게 폭력을 발휘할 수 있거나, 내 탓이 없음을 입증할 수 있어서 죄책감이 없을) 상황만 허락한다면 거리낌 없이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대상이 '눈사람'이라는 것으로 논의의 중점을 흐려집니다. 눈사람을 사소한 대상으로 상정하는 것 자체부터 이미 폭력적인 태도입니다. 어떠한 낭만적인 감정도 배제하더라도, 너무나 자명하게 누군가가 오락을 위해 만든 결과물입니다. 하다못해 노동력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결과물에 대해 폭력을 저질러도 되는 어떠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폭력의 책임을 가해 주체가 아닌 대상의 존재적 무게감에 전가하는 시도로 폭력의 층위는 형성합니다. 즉, 눈사람이 안되면 눈뭉치는 괜찮다거나, 눈뭉치도 안되면 눈조각은 괜찮지 않느냐는 식의 계급 쌓기입니다. 이 층위는 어떠한 실체도 없이 그저 죄책감을 희석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대상의 특징을 통해 '괜찮은 폭력'과 '괜찮지 않은 폭력'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결국 눈사람과 사람 사이에 수많은 대상을 상대로 한 폭력을 차례로 용인할 것입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인간에 대한 폭력도 용인하기 시작하겠지요.


 그리고 '어떠한 대상이 되었든 폭력은 동일하다'는 명제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공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이 공감하기 힘듦은 질감뿐만 아니라 악플이나 언어폭력 등의 거리감도 포함됩니다.) 스스럼없이 수많은 대상(비생명체 포함)에게 폭력을 가했던 죄책감을 자극하여 발생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도 눈이 많이 내렸고, 이번 겨울에도 눈사람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눈사람을 부수려는 사람들(눈사람을 부수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은 눈사람을 부수겠다는 의지와 동일하게 기능합니다.) 사이에 긴장감이 팽배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눈사람에 대한 폭력은 '눈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용인될 수 없습니다. 어떤 대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폭력'은 그 자체로 '폭력'이며, 그저 손쉬운 대상을 찾아다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시기 바랍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