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한 조화', '분업적 단절'과 맞서기
신이 모든 것을 예정해 놓으셨고, 이 세상은 상상 가능한 모든 세상 중에 가장 선한 세상이라고 말한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는 당시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멸시, 혐오, 강간, 폭행과 착취는 일상이었으며, 비참하고 가난하게 태어난 것을 극복할 수 없는 세상에서도 '이 모든 것은 신이 의도한 선'이라는 믿음으로 모든 역경과 부조리를 감내했습니다.
의존적인 낙관주의는 계급적 사각지대의 개인들에게 생각보다 유의미한 선택지였을 것입니다.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삶마저 신의 그림에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모든 의미에서 자신의 신성성을 정당화하며 모든 고난을 '그러려니' 할 수 있게 합니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선택지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볼테르는 <캔디드>에서 억압적 낙관주의를 격동적으로 비판합니다. "설탕 케이크인 줄 알았던 세상에서 이젠 내가 내 손으로 빵을 구울 것이다. 모든 풀과 모든 나무가 굳은 땅 위에서 자라나듯 우리는 집을 짓고 장작을 패고 그리고 우리의 정원을 가꿀 것이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정도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계급에서 벗어나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이야기하고 각자의 노동으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일단 그렇다고 합시다.).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문제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내 빵이 구워지기 전, 그 밀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집을 짓고, 장작을 패고, 정원을 가꾸는 개인들은 집 안에 들어가 타인을 공감하는 법을 잊고, 장작이 돼버린 나무도 굳은 땅 위에서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음을 잊고, 내 정원에 갇혀 누군가를 초대하여 대화하는 법을 잊었습니다. 모든 것은 이미 조화롭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인간은, 이젠 모든 것과 단절되어 있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연결"
전 시대에 걸쳐 우리가 잊고 있던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무책임한 조화'의 계급적 구조와 '분업적 단절'의 계층적 구조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게 만든다는 지점에서 마주칩니다. 한쪽은 서로에 대해 알 필요를 없애었으며, 다른 쪽은 서로에 대해 알 의욕을 없애었습니다.
각 개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관계 맺으며 존재를 구성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래서 연결은 단순히 관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연결"에 대한 논의는 구조에 억압되어 '큰 그림'에 개인을 가둬놓은 시대와 '자유'를 곡해하여 개인을 스스로 고립시켜 버리는 시대에 맞섭니다. 참된 자신을 알기 위해 '관계 맺음' 한가운데 있는 자신과 자신이 서 있는 '관계 맺음'을 알아야 합니다.
"연결"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마주치는 것'을 넘어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수월한 시대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공포 때문에 배격하지 않고, 사랑으로 마주 보는 시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손을 잡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하는 대신, 이미 우리는 손을 잡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