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통해 본 김승옥의 서울,1964년 겨울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아무래도 별 재미가 없다.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읽으며 긴장하고, 놀라고, 고민하며 작중 인물들과 호흡하게 되는 것과는 딴판이다.
서사의 흥미로움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사건을 보라. 모르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고, 불구경을 하고, 택시를 타고, 누군가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1964년 겨울>은 역시 재미가 없다.
왤까?
‘나’의 위치가 다르고, ‘나’의 표면적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타인의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는 타인의 자리가 비어있다.
<병신과 머저리>는 형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환부다운 환부가 없는” 나의 병신 같음, 머저리 같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끝맺는다. 이청준은 아주머니와 ‘나’의 시선을 통해 형의 아픔과 그 극복을 그려내고, 아주머니와 형, 그리고 혜인의 시선을 통해 나의 병신성, 머저리성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독자는 한 시선에 함몰되지 않고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병신과 머저리>에 등장하는 ‘나’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또한 타인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나’는 형의 소설이 “끝이 맺어질 때까지 …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에 빠지는데, 이는 ‘나’가 세상과 소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상에 깊이 영향을 받는 것이다. 독자는 전지적 작가에 의해 총체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위치와 시야에 의해 구현되는 ‘나’의 모습을 통해 현실적인 입체감을 확인하게 되고, 혜인과의 관계와 형과의 상호작용을 겪으며 요동치는 ‘나’의 외곽선을 통해 세상과 밀착한 ‘나’의 자아를 느낄 수 있다.
반면 김승옥의 <서울, 1964년의 겨울>의 ‘나’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나’는 폐쇄되고 이기적인 자아 안에 갇혀 있는데, 이는 길거리의 모습을 묘사하는 시점에 잘 드러나 있다. 단순히 약을 홍보하는 광고판을 “광고판 속에서 예쁜 여자가 춥지만 할 수 있느냐는 듯한 쓸쓸한 미소를 띠고”있다고 해석하고, 네온사인이 점멸하는 광경도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는 듯이 황급히 꺼졌다간 다시 켜”진다고 본다.
‘나’의 세상은 ‘나’에 의해 창조되고 있다.
모든 것은 ‘나’가 보는 시점에 세상에 등장한다.
독자는 ‘나’의 서술을 통해서는 ‘나’의 자아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더욱이 <서울, 1964년의 겨울>에는 이를 보완할 타인의 시선이 부재하다. 세 인물은 함께 있으나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서로에게서 각자가 알고 싶은 면만을 포착한다. 소위 말하는 '집단적 독백'의 현장이다.
안과 ‘나’는 사내와 어울리면서도 “우리는 꺼지는 게 어떻겠느냐”고 생각하며 각자의 이야기만을 하고,
사내는 그들이 “누구”인지 상관없이 단지 그 날 밤을 함께 있어주기를 바란다.
이들은 폐쇄회로에 갇혀 필요에 따라 서로를 사용할 뿐이다.
이들은 자신과 다른 타인, 다른 시선을 가진 타인을 용납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안과 사내를 통해 ‘나’의 입체감을 느낄 수가 없다. 그들은 그저 또 다른 ‘나’일 뿐, 세상을 인식하고 호흡하는 데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서울, 1964년의 겨울>에는 서로 다른 ‘나’의 변주곡만 끊임없이 연주된다.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하는가? 지적 즐거움, 순수 예술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뿐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재미가 소설에도 있어야 하는가?
있어야 한다. 재미가 있어야 이야기에 생명력이 생기고, 오랜 기간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다.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는 기막히게 재미있다. 형뿐만 아닌 나 또한 병신이자 머저리였다는 반전, 한 인물에 대한 다각도의 표현은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김승옥의 <서울, 1964년의 겨울>은 역시 재미가 없다. <서울, 1964년의 겨울>은 작가의 에세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