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저는 멀쩡하게 국어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글의 구조에 따라 요약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었고, 수업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교과서에 들어있는 지문은 ‘한지를 만드는 과정’과 ‘한지의 쓰임새’가 주요 내용이었고, 과정이 있는 글을 시간 순서로 요약하는 방법을 공부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국어 시간이 끝날 때 아이들과 저는 본인의 집에서 자기가 몇 번째 자녀인지, 그 순서의 장점은 무엇이며 아쉬운 점은 무엇인지를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수다를 떠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다니 참 황당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왜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기를 해봐도 왜 형제, 자매, 남매 이야기가 나왔는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점이 두 번째로 황당한 포인트였습니다.
평소에 아이들은 툭하면 ‘오빠가 싫네, 누나가 무섭네, 동생이 말을 안 듣네.’라며 형제에 대한 하소연을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생각이 항상 궁금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속은 시원해졌습니다. 아래에 아이들의 생각을 옮겨보았습니다. 아이들의 감정을 실감 나게 전하고자 아이들이 쓴 언어를 거의 그대로 적어 어휘가 정선되지 않은 점은 양해 바랍니다. 그럼, 아이들의 속마음을 함께 보실까요?
첫 번째, 외동
▶ 장점 : 외식 메뉴 선택권 우선, 닭다리 독점, 내 물건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지럽혀지지 않음,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음
▶ 아쉬운 점 : 혼나는 것도 독점, 부모님의 사랑 독차지는 좋지만 항상 부모님을 나 혼자 상대하고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음, 게임을 혼자 해야 함, 어릴 때는 조금 심심했으나 친구가 있어서 지금은 좋음. 지금도 조금 심심, 심부름을 할 사람이 나 혼자임, 같이 잘 사람이 없음, 내 편 없음
두 번째, 장남, 장녀
▶ 장점 : 혼날 때 동생을 끌어들일 수 있음, 첫째의 이름으로 엄마 아빠가 불려짐(00이 엄마), 동생 부려 먹기, 놀려 먹기, 용돈 뺏기, 화풀이 가능, 장남 특별 대우 가능, 심심할 때 동생 이용 가능 심지어 동생이 맨날 짐, 동생 속여 먹기, 각종 선택권 우선, 첫째에게 쏟는 사람 경험 가능(둘째부터는 대충 넘김)
▶ 아쉬운 점 : 동생이 혼나면 나한테 불똥이 튐(네가 잘했어야지 등), 동생한테는 관대하고 나한테는 엄격한 부모님, 동생의 거짓말에 속수무책 당함, 귀엽기도 하고 꼴 보기 싫지만 동생이 없으면 심심함(동생한테 중독된 거 같다), 나쁜 짓만 배워서 써먹는 동생(내 탓 함), 든든한 언니나 오빠가 있으면 하는 생각
세 번째, 막내
▶ 장점 : 오빠만 혼남, 누나가 혼날 때 구경 가능, 누나가 혼나고 삐져 있는 상황에 조금만 착한 일을 해도 폭풍 칭찬을 받음, 엄마 찬스 가능, 오빠 부려 먹기 가능, 누나 덕에 현실을 일찍 깨달음, 나랑 형, 누나가 혼나는 강도가 다름, 언니는 늦게 한 것들을 나는 빨리 경험이 가능(핸드폰 게임 등), 다른 형제와 편을 먹고 팀전 가능
▶ 아쉬운 점 : 형, 누나에게 용돈을 뺏김, 권력에 의한 폭력, 혼날 때 거드는 이가 많음, 심부름 셔틀임, 부모님의 사랑이 다르게 느껴질 때 있음, 누나가 내 물건 맘대로 씀, 메뉴 선택권 무조건 누나 먼저, 양보가 습관화, 가만히 있는데 놀리는 장난감임, 사춘기, 입시생 등 다른 사람들 눈치 봐야 함, 맨날 순서가 꼴찌, 형, 누나들은 자기 맘대로 하는데 혼은 나만 남, 누나들의 장난감(공주놀이 마네킹)
네 번째, 중간
▶ 장점 : 최소 3명이라 놀 사람이 많음, 모르는 거 서로 알려주고 배움, 혼날 때 엄마의 분노가 분산됨(가운데는 살짝 분노에서 멀어짐), 다자녀 혜택 많음
▶ 아쉬운 점 : 첫째들과 막내의 아쉬운 점 모두 합친 것, 동생이 괴롭힘, 언니가 나한테 화냄, 다른 형제가 편 먹고 나만 괴롭힘, 팀전에서 지게 됨, 부모님의 사랑이 첫째와 막내에게 가서 나는 소외됨, 나는 남자인데 오히려 여자들에 대한 정보를 더 잘 알게 됨 (내가 여자가 되는 느낌)
어떠세요? 독자분들 본인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어릴 때 느꼈던 감정과 지금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이 비슷한가요? 비록 국어 시간은 사라졌지만 아이들과 재미난 추억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다음 국어 시간은 두 배로 열심히 달려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