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단어 하나하나에 담겨져있는 사치스러운 감정의 쓰임새에 대하여.
책보다 트위터를 통해 먼저 알게되었던 작가, 황현산 선생님의 책 중 내가 두번째로 손에 쥔 책은 <우물에서 하늘보기>였다. 전작 <밤이 선생이다>를 굉장히 좋게 읽었기 때문에 기대가 많았던 한 편, 영 친해지기 어려운 시에 대한 이야기였어서 출간 되자마자 덜컥 구매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손내밀지 못했던 책이기도 하다. 아, 물론 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난폭한 독서>를 겨우겨우 읽어내느라고 더더욱 첫 장을 펼치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도 있고 말이다.
<밤이 선생이다>를 읽을 때 역시 비슷한 것을 느꼈었는데 황현산님의 글은, 유난히 앞 뒷 문장의 연결성이 강한 것 같다. 앞의 문장을 읽지 않을경우, 뒷 문장의 의미가 전혀 읽히지 않는 문장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책들을 읽을때면 밑줄긋기 식으로 몇 개의 문장을 뽑아낼 수 있는 반면, 황현산님의 글은 그게 불가능했다. 한 꼭지 한 꼭지가 통째로, 강하게 묶여있는 문장들이었고, 그래서 가끔은 그 문장들이 버거웠었다.
<밤이 선생이다>를 읽을 때도 같았다. 유난히 한 꼭지를 다 읽어내는데에 시간이 배로 걸렸고 숨이 찬 듯 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숨 찬 느낌이 싫지 않았다. 문장에 쫓기듯 달려나가는 느낌이 오래간만에 그저 활자를 흡수하는 게 아니라 활자와 싸우고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충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우리의 일상속에서 일어난 일로인해 떠오르는 어떤 시에 관해, 혹은 어떤 시인의 글쓰기에 관해, 또는 시 쓰기라는 행위의 의미에 관해. 시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내는 글들을 읽으면 잘 알지 못한다 생각했던 시라는 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미적이거나 퇴폐적인 예술이 아니더라도,
예술을 예술되게 하는 기본요소에서 사치는 큰 몫을 한다. (중략)
시를 쓰는 시인이 감정의 사치를 위한것이 아니라면
운과 박자를 맞추기 위해 왜 그렇게 긴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장 강렬하게 뇌 속에 박힌 단어는 다름아닌 '사치'였다. "저 보이지 않는 삶을 이 보이는 삶 속으로 끌어당기기"위한 시인의 사치. 그 단어 하나하나에 담겨져있는 사치스러운 감정의 쓰임새를, 그 사치의 '가치'를. 우리는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묻기를 두려워하는 지쳐빠진 마음"으로 모른척 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문장들이었다. 이 책을 통해 시라는 문학을 더 잘 알게 되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여전히 시라는 짧은 문장, 짧은 단어들 속에 꽉 들어찬 사치스럽게 쓰여진 의미가 버겁고, 해석하지 힘들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선택되기까지의 단어가 담고있는 시간과, 의미에 대해 조금이나마 '눈치' 챌 수 있게 된 것. 그럼으로써 한 걸음 더 '시'라는 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것 같은 마음이 들게 한 것 만으로도 이 책은 내게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 아름다운 문장의 사치를 함께 누리고 싶어졌다는 것 만으로 말이다. 몇 번이나 소리내어 읽은 긴 한 단락의 글을 적으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싶다. 황현산 선생님의 좋은 생각이 담긴 좋은 글을 오래도록 함께 하고싶다. 건강하시길.
나태와 무책임에 형식이 없듯, 악의 심연에도 형식이 없다.
미뤄둔 숙제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쌓아둔 죄악이 우리를 마비시켜,
우리는 제가 할 일을 내내 누군가 해주기만 기다리며 살았다.
누군가 해 줄 일은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다. 아니, 기다리지도 않았다.
책 한줄 읽지 않고도 모든 것을 다 아는 우리들은
"산다는 게 이런 것이지"같은 말을 가장 지혜로운 말로 여기며 살았다.
죄악을 다른 죄악으로 덮으며 산 셈이다.
숨쉴때마다 들여다보는 핸드폰이 우리를 연결해주지 않으며,
힐링이 우리의 골병까지 치료해줄 수 없으며
품팔이 인문학도 막장드라마도 우리의 죄를 씻어주지 않는다.
실천은 지금 이 자리의 실천일 때만 실천이다.
진정한 삶이 이곳에 없다는 말은 이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 삶을 지금 이 모양으로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