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할 만큼 했다.

by 이병도

6시. 지금은 이때가 되서야 오늘의 날씨가 어떨지 예상해볼 수 있다고 어제 생각했는데 세상은 껌껌했다. 설거지를 하고 밥을 짓는 동안 세상은 서서히 푸르스름 밝아졌다. 어제 불현듯 눈에 띄어 뽑아둔 명상록을 서론부터 읽기 시작했다. 86. 표지 뒤 첫 장에 적힌 이 숫자는 이 책은 아버지가 1986년에 구입하셨다는 표시였다. 옮긴이와 아우렐리우스, 밑줄로 표현된 당시의 아버지를 동시에 느끼며 서론을 읽었다.


밤사이 비가 왔거나 지금 비가 오는지 현관 앞 보도블럭은 물을 머금어 짙었다. 현관 밖으로 손을 내밀어보니. 이어 올려다 본 하늘은 흐렸지만 저기 구름 뒷편으로 파란 하늘이 보여 곧 맑아질 것 같았다. 시작했다. 역시 그저께부터 갖가지 밀가루를 마구 먹어 출력이 영 형편 없어 몸이 뻑뻑했다. 사천교에 올랐을 때 초등학교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차임벨이 울려퍼졌고 곧 이어 무궁화호가 지나갔다. 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아 오늘 내 몫을 해낼 거란 처음의 밝은 기대가 점점 아득해져만 갔다. 정말 짧게 달리고 돌아오자. 저 앞의 러너 아저씨를 재칠 생각은 하지 말자. 그저 가볍게. 가볍게. 그러나 아저씨가 워낙 느려서 의도치 않게 재쳐버렸다. 날이 흐리니 불광천길로 들어갔다. 더도 말고 불광천 다섯 바퀴만 달릴까? 그냥 일단 한강까지만 가보자.


오늘은 수변길에서 나를 기다리는 동물 친구는 없었다. 오늘은 길 반대편을 가득 매워 걸어와 내가 오랜만에 그 옆길로 달려갈 수 있게 한 보행자들의 권유와 이에 잠시 들어선 보행로의 옆에 있는 야구장의 팬스 설치 방향에 대한 의문, 통행제한봉이 제쳐진 생태탐방로 옆에서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노인에 대한 의문과 마주했다. 당신의 함정이야?


캠핑장을 떠나 조용하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파나메라를 따라 하늘공원 브릿지를 넘어 노을공원 둘레길에 들어서 흙 위를 달리자 비로소 몸이 부드러워졌다. 매일 태어났지만 또 매일 떠나는 새들을 볼 일이 별로 없는데 내 오른편에는 까치 한 마리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를 위해 이마에서 가슴으로 성호를 긋고 잠시 묵념했다. 얼마전 바다에서 잠든 갈매기를 위해서도 한 번 더. 나는 이제 터덜터덜 달리는 게 좋다. 뭔가 야생적이고 솔직함을 담는 거 같기에. 종종 마치 사냥감을 밤낮이고 좇을 것처럼 달리던 재정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가 같이 달릴 때 그는 종종 자기 자세를 설명하는 했는데 나는 그걸 헛소리라 생각하며 무시했다.


비가 조금씩 내려 안경에 물방울이 맺혔다. 촉촉한 큰 메타세콰이어숲의 소로를 따라 하늘공원 완만한 오르막에 들어섰다. 변속이 훌륭하지 않은 라이더들을 지나 방금 전 나를 지나간 맹꽁이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릴 때 쯤 정상에 도착했다. 1,2,3,4,5. 힘이 없었다. 죄에 대한 벌 또는 단련을 위해 플러스 요소로 곁들이는 불광천과 노을공원을 모두 다녀와 하늘공원의 한 면 한 면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 아무튼 해냈다. 물론 이정도로는 몸에 대한 사과로 충분할 수 없었지만 전에 엄두조차 내지 못한 플러스 요소 전부를 성공적으로 이었으니 몸에게 양해를 구하고 하늘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대부분 등산복을 입고 가방을 매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 중 스틱을 든 이도 있었다. 계단 중간에 멈춰 경치를 바라보거나 곳곳을 설명하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기 보이는 월드컵육교, 월드컵경기장-평화의공원 연결로. 저곳을 달리는 내 모습이 여기서 카메라에 담기면 정말 멋질 거 같았다. 코폴라와 앤더슨, 하야오의 구성처럼.


다시 땅에 발이 닿았을 때 오늘 따라 곳곳에 비치된 손소독제를 잠깐 쓰고 월드컵육교를 넘어 바람의 언덕을 달렸다. 화요일에 예초를 하더니 이곳은 과연 잘 다듬어진 머리 같이 변해있었다. 생기가 없어보였다. 목이 말랐다. 하지만 물을 마시기 위해 멈추면 시동이 꺼질 거 같아 그냥 홍제천길로 바로 들어가 오늘 내게 허용된 정도로 질주해 달리기를 마쳤다. 난 할 만큼 했어. 다음주부터 다시 연료에 불순물을 추가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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