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함과 무거움 속에서.

by 이병도

아침의 햇빛는 생기를 불어넣는다. 몇 년 전에 방음벽에 둘러쌓인 창문이 없는 작업실에서 어쩔 수 없이 밤에 자고 일어나면 불쾌해하곤 했다. 그에 결코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오늘 아침이 그런 셈이었다. 세상은 어둡게 흐렸다. 흐릿한 빗줄기가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달릴 생각이 사라질 뻔했지만 10시 40분, 게으름과 나태함에 혀를 차고 빗 속에 나를 던졌다.


햇빛이 없어 선선했다. 옅게 흩뿌리는 비는 촉촉하게 느껴졌다. 박스가 가득 담긴 수레를 센터로 끌고 가는 할머니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역시나 10월이었다. 사천교를 오르자마자 더웠고 공기의 촉촉함은 무겁게 느껴졌다. 바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힘든 조건이었다. 거의 마르지 않을 땀을 티셔츠에 한껏 머금고 달려야 할테니. 비를 한껏 머금어 차분하고 엄숙해보이는 길과 나무와 풀. 길 위에 보행자와 라이더는 별로 없었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하이라이트가 날아간 것처럼 하얬다.


이렇게 흐린 날에는 불광천을 달려야했다. 마치 고속도로처럼 쭉 뻗은 그 길을 햇빛이 내리쬐는 날에 달리기는 정말 아찔하기 때문이었다. 가끔 스스로에게 벌을 줄 때는 그렇게 하지만. 그래서 오늘, 지금이었다. 홍제천 불광천 합류 지점에서 나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불광천으로 뛰어들었다. 촉촉한 길 위에서 꽤나 귀여운 발소리를 내며 쭉 달려 청구아파트 진입로 앞 다리를 건너 다시 홍제천으로 돌아와 한강으로 달려갔다.


수변으로 들어서자 지난달 내 생일 다음날 이 길에서 처음으로 만난 신비한 새가 떠올랐다. 머리 위에 멋진 장식을 가진 그는 나를 길 중앙에서 마주했으며 우리 사이의 간격이 좁혀지자 높이 날아가 다시 저멀리 길 중앙에서 나를 마주했다. 또 그랬고 또 그랬고 또 그랬다. 마치 나를 안내하듯이. 어린 시절 포켓몬스터 게임에서 전설의 새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특정 조건을 만족하지 않아 아주 가까이는 가지는 못하는. 타지리 사토시는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을 잘 간직하고 반영했던 것이었을 거다. 미야자키 하야오, 테라오 겐. 기억을 더듬기를 마치자 이번에는 한 고양이가 저쪽 길 중앙에서 나를 그윽히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너구나. 그는 나에게 큰 관심은 없었는지 간격이 좁혀지자 풀숲으로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고양이. 관심과 무관심의 사이. 역동과 정적의 사이. 기술과 자유과의 사이.


오늘의 요동은 무엇일까? 아침에 달리기 전에 자유론 펭귄 북스판의 서론을 드디어 넘어 밀의 얘기를 들었다. 빌어먹을 올버즈 코리아도 떠오른다. 밤 사이의 네가지 옴니버스로 구성되었던 꿈도 떠오른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777이 뜨는 순간이 있다. 몸과 정신, 생각, 감정 등은 모두 분리되어있는 개개의 존재다. 우리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라고 할 수 없는 이들. 우리는 달리는 동안 수많은 논쟁과 협력을 반복해 몇몇 멋진 결과물을 만든다.


비 내리는 산길, 매봉산 2단지 앞 산책로를 오르고 싶었다. 하늘공원 브릿지를 오르며 그곳에 어떻게 가는 게 가장 합당한지, 그곳에 가는 건 합당한지 따져보았다. 가는 건 합당했다. 그러면 전처럼 노을공원 둘레길-노을공원 완만한 오르막-하늘공원로가 합당한지, 불현듯 떠오른 큰 메타세콰이어 숲길-하늘공원 완만한 오르막-하늘공원로가 합당한지 따져봤다. 매봉산으로 가는 길에 큰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포함시킨 적이 없었기에 두번째 구상을 따르기로 했다. 촉촉한 숲을 지나 오늘 따라 수많은 보행자와 라이더들을 지나 가장 먼저 정상에 올라 그대로 내리막을 내려갔다. 여기서 하늘공원로로 바로 가는 건 좀 쉬운 거 같아 경사가 거의 80도인 노을공원 급한 오르막을 올라 노을공원 둘레길을 돌아서 갔다. 이어 난지 1교를 건너 차도 옆 보도블럭을 따라 달렸다. 이곳에서 나는 물고기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잠시 숨을 쉬러 나왔는가, 아니면 잠시 잠수를 하는가?


횡단보도를 건너 약간의 오르막을 지나 매봉산 산책로를 올랐다. 한 층이 100m로 구성된 6층 산책로. 산을 깎아 데크로 만든 산책로. 사랑하지는 않지만 사람으로서 고마움을 느끼고 좋아하는 산책로. 나뭇잎과 풀잎, 흙을 촉촉히 적시는 빗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산길을 기쁘게 달려 월드컵경기장에 도착했다. 월드컵경기장에 올라 잠시 걸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평화의공원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다시 가슴과 눈이 열렸고 바람의 언덕을 지나 홍제천에서 차례로 속도를 높히며 질주해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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