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
자영업자와 월급쟁이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한쪽에서 파티를 즐기는 부류가 있었으니 바로 자산 투자자들이었다. 부동산, 주식, 코인으로 재미를 본 사람들. 그들은 분노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이 샴페인과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정의롭지 못한’이라는 형용사가 그들 뒤를 따라다녔다. 이상하긴 했다. 실물경제는 차갑게 식었지만 자산은 뜨겁게 달아올랐으니까. 이 기형적인 불균형 속에서 질투와 주식 열풍이 시작됐고, 은행이 마구 뿌리는 돈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났다.
2020년부터
코인에서 돈 냄새가 진동했다. 그 냄새가 정부의 콧구멍까지 찔러댔다. 정부가 전 국민, 특히 자영업자들의 주머니에 돈을 꽂아 준 탓에 국고가 가벼워졌던 참, 정부는 돈잔치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필요했다. 원칙과 명분은 있었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
이 말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문명에서 꼭 필요한 명제고, 국가 재정의 커다란 엔진이요, 인류가 점토판에 글씨를 쓸 때부터 지금까지 통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코인으로 번 소득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정부 지휘하에 과세는 시동을 걸었다.
내용은 ‘가상 자산 양도차익을 기타소득으로 간주’, ‘250만 원 공제’, ‘250만 원을 넘어서는 금액에 20%에 소득세 부과’. 파티장에서 춤을 추던 코인 투자자들은 똥 씹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투자자들은 이렇게 되물었다.
“떨어지면 보호해 주나요?” 고독한 말이었다. 마치 로마군에 곡식을 빼앗기는 유대인처럼 여기저기서 울분이 터졌다. 누구는 정부를 향해 엿이나 먹으라고 소리쳤다. 집 없는 젊은 세대가 가진 계층의 사다리를 정부가 흔든다는 이유였다. 또한 그들은 인지부조화(반대되는 믿음을 동시에 지닐 때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동안 그들은 ‘멍청한 중독자’ 취급을 받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구경거리용처럼 방치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세금은 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애초에 세금의 첫 이름은 약탈이었고, 정부라는 큰 권력이 투자자들을 껍질부터 야금야금 벗겨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2021년 9월 30일, 당시 홍남기 부총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과세 불가피”.
아, 그런데 하늘의 뜻은 달랐다.
2022년 3월에 있을 대선이 상황을 바꿔버렸다. 당시 정권 심판자를 자처한 정치 신인 윤석열이 지지율에서 한 발짝 앞섰다. 이재명의 여당으로선 한 표 한 표가 중요했던 상황. 정부는 너그러운 제스처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논쟁 많은 과세를 진행한다는 건 이재명과 여당의 지지율에 짱돌을 던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2021년 11월 30일.
결국 과세안은 유예됐다. 이유는 과세 준비 부족. 만장일치 통과였다. 대선이 서로 으르렁거리던 여당과 야당을 하나로 묶은 셈이었다. 물론 노골적인 표심 사기라는 비판도 있었다. 관료들은 역겨움을 느꼈을 거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정치인은 관료가 아니기에 지지율 계산기를 두드렸고, 지지율이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과세에 찬성할 배짱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론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세금을 걷는다? 닭이 소리 내지 않게 하면서 깃털을 다 뽑는 것만큼 어려웠다.
세상 사람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였다.
유권자는 국민이고, 국민은 세금을 싫어한다는 것. 홉스가 말했던가? 인간은 세금을 불평등만큼 고통스러워한다고. 자신이 가진 것 중 한 조각을 흔쾌히 떼어내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건 인간의 부도덕성이나 이기심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심성을 말하는 것이다. 세금을 싫어해서 온갖 창의적인 노력을 해 온 게 인간이었고, 세금 때문에 폭동을 일으키고, 세금 징수원을 살해하고(실제로 세금 징수원은 위험한 직업이었다), 왕의 목을 베고, 왕에게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지 말라는 도장을 받아내고, 정권을 바꿔버리고, 독립을 하고, 세금 때문에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고 하는 게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