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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제 올드스 Olds Jan 25. 2023

차이 (2): 부끄러움 <2021.7.15~7.31>









그들은 잘 살고 있었다.

L은 졸업을 준비 중이었고 시계를 모으며 헬스장을 자주 간다고 말했다. K는 주식을 시작했고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여자친구와 4년 동안 연애 중이었다. 처음엔 모두가 군대 얘기는 하기 싫어했다. 하지만 술을 마실수록 그 얘기가 밖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방패, 햇빛, 핫팩, 야간봉, 무전기, 화장실, 은색 식판, 경찰 마크, 따가운 땀, 분리수거장, 한 번쯤은 다시 보고 싶은 사람들. 기억나는 모든 걸 말했다.    






  

그날 밤

우리는 누군가를 욕하며, 누군가를 추억했고, 오래전에 함께 겪은 악몽에 몸서리치며, 사건을 과장하며, 옛날이야기를 해댔다. 많이 웃었다. 입에서 폭탄이 터진듯한 파열음, 테이블을 탕탕 치는 채찍질. 대가리가 터져라 웃었고, 목이 부러진 듯, 배가 아프듯 쓰러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군대’라는 주제를 벗어나면 나는 대화하지 못했다. 로스쿨과 학비, 주식과 여행, 시계와 골프, 스피커와 차를 고르는 취향은 내가 모르는 주제였다. 둘은 말이 통했다. 그들은 어떠한 비용도 걱정하지 않는 듯이 말했다. 나는 내가 어떻게 보일지 두려워하며 짧게 웃을 뿐, 대화에 공감하지 못했고 겉돌았다. 우산에 쫓겨난 어깨처럼.           




특히 돈 얘기엔 입 뻥끗 못했다.

기둥에 묶인 개처럼 돈이란 주제를 빙빙 돌며 현실을 외면했던 기억이 난다. 한편, K는 열정적으로 돈이란 게 어떻게 흘러가는 놈인지 설명해 줬다. 그는 자신을 ‘주린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나에겐 K는 경제학자처럼 보였다. L은 IMF 외환위기 때 부모님이 싼값에 건물을 사들였다는, 그래서 큰돈을 벌었다는 옛날이야기를 해줬다. 취하면 기억하지 못할 가족의 역사를 쏟아냈다.           




그날 밤

우리는 취했고, 평생의 우정을 약속했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생물이 적은 사막 지역에선 유일신 종교가, 생물이 많은 열대지역에선 다신교가 탄생했다.” 자연환경이 종교의 세계관을 결정했다는 주장이었다.        



                 

왜? 왜 그걸 생각했을까? 

너무나 다른 환경과 뿌리를 느껴서였겠지. 빵빵한 집안 특유의 취향과 씀씀이가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눈과 코와 귀와 혀에 스며들어서, 시간과 함께 굳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가진 꿈의 크기와 그들이 쓰는 어휘, 그들이 가진 영수증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나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말하는 ‘계급’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전에는 ‘계급’이란 게 존재하긴 하지만 만질 수 없는 적도처럼 느껴졌지만, 그날 나는 확실히 계급을 느꼈다.           




직감했다. 

내 통장의 즙을 짜도 그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걸. 그래서 내가 그들을 좋아해도, 그들이 나를 좋아해도 결국 나는 버티지 못하고 튕겨나갈 것임을 알았다. 내가 그들을 흉내 내려고 해봤자 실패할 것임을, 나는 반드시 비루함과 부끄러움을 느낄 것임을 알았다.        



   

기억난다.

‘이상한’ 감정에 대한 의문. 지금에 와서야 고백한다. 사실 부끄러움이었다. 못 본척하고 지나치고 싶었지만 어느새 나는 비교를 하고 있었다. 나에게 당연한 내 부모, 내 거리, 내 집, 내 방, 나의 생활, 나의 일을 그들의 시선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친숙한 세계가 천박한 세계로 보였다. 잔인한 계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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