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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제 올드스 Olds Feb 03. 2023

독서했다는 후회 (2) <2021.7.15~31>









낭만주의 다음은 리얼리즘이다.

역사도, 사랑도, 사람도 그렇게 변하는 것 같다. 그때 쓴 메모를 보면 군대 동기들을 만나고 나서야 내 마음속 풍향계가 ‘낭만’에서 ‘리얼’로 바뀌었다는 걸 읽을 수 있다. 고민의 흔적에서 시간을 낭비했다며 초조함에 빠졌다는 걸 읽을 수 있다.         



      

물건을 잃어버리면 과거로 뒷걸음질 친다.

“방에 들어오기 전에 가방을 던졌고, 그전에 버스를 탔고, 그전에 카페에 있었지.” 항상 이런 식이다. 기억의 역류. 왜 나는 이렇게 살게 된 건지, 내가 무엇을 놓쳤고,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기 위해서 차근차근 과거를 회상했다.               




제대하고 정말 책만 읽었다.

침대에서 눈을 뜨면 팬티를 입고 창문을 열고 아직 때 타지 않은 공기에 얼굴을 씻었다. 커피를 끓이고 가습기를 켜고 눈곱도 떼지 않고 안경을 썼다. 그저 맨얼굴로, 안경알이 눈 밑에 하얀 달을 그리는 학자풍의 얼굴로 책상에 앉았다. 책을 펼치고 서걱서걱 종이를 넘겼다. 옆에는 책들이 위태롭게 기둥 모양으로 쌓여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커피를 마시며 계속 읽었다. 

차가운 햇살이 어둠을 밀어내고, 베란다에 햇빛이 떨어질 때 쯤 샤워를 시작했다. 그게 루틴이었다.       



   

아침도 책, 점심도 책, 저녁도 책. 

지하철에서도 책, 공원에서도 책, 도서관에서도 책. 책만 읽다가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건 아주 드문 일. 오랫동안 혼자였다. 지저분한 수염을 방치했다. 서로 어울리고, 사랑에 빠지고, 상처받는 일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소름 돋도록 똑같은 일상. 표정 없는 독서의 얼굴. 그게 다였다. 좀 웃기지만, 내게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도 있었다. 독서를 하면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 마음이 공허했다.       



   

독서실과 도서관에서 일을 했다. 

읽고 먹고, 먹고 읽어야 했으니까. 불안정하고 토막 난 일자리였다. 메뚜기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제대를 했지만 복학을 미뤘고 취업에 관심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관습에 침을 뱉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독서는 재밌는데, 표준적인 삶은 따분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내 삶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어딘가 비틀리고, 왜곡돼서 겉돌았다. 한 마디로 무능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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