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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Oct 25. 2022

그 곳에도 광주 5.18이 있었다.

튤립 꽃 필 무렵 일어난 피의 혁명, 키르기스스탄 튤립혁명

"탕! 탕! 탕!"

총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쓰러졌다. 몸뚱이 하나 숨길 곳 없는 넓은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지만 그들은 피하지 않았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동지들을 맨몸으로 에워쌌다. 다시 모여 소리 높여 독재자의 퇴진을 외쳤다. 그때 다시 '탕! 탕! 탕!'. 총소리와 함께 수많은 시민들이 또 쓰러졌다. 


"옥상이다." 


한 사람이 외쳤다. 멀리 대통령 궁 옥상에 어렴풋이 반짝하는 금속 빛의 총구가 보였다. 총을 겨눈 군인들은 마치 게임하듯 광장의 시민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하였다. 2010년 4월 7일, 그날 그 광장에서는 단지 민주주의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86명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영화 속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불과 10여 년 전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의 광주 5.18이 떠올랐다. 1980년 5월, 그때 그 군인들도 도청 앞에 있는 광주 시민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하고 헬기에서 기총 소사도 했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시민의 생명은 안중에 없는 것이 전 세계 독재자들의 특성인가 보다. 

▲ 튤립혁명 기념탑 알라투 광장 한쪽, 대통령 궁이 있는 백악관을 바라보는 자리에 튤립혁명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세워져 있다. 시민들이 검은 색의 독재, 부정부패 등 악의 세력을
▲ 대통령 궁이었던 백악관과 희생자가 많았던 철제 울타리  백악관은 현재 대통령 집무실이 없으며 대부분 철제 울타리도 철거되어 있다. 다만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몇몇 울타리는 안아

 튤립혁명!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고전적인 문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에게 40여 년 전 피의 광주가 있었다면 키르기스스탄에도 불과 10여 년 전 민주주의와 목숨을 바꾼 피의 혁명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피의 혁명을 튤립 혁명이라 불렀다.


광장 한쪽에 튤립이 막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 시민들은 알라투 광장에 모여 대통령 궁인 백악관으로 몰려 갔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마음 하나뿐 모두 무장하지 않은 맨몸이었다. 독재정권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들었고 많은 시민들은 튤립 같은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비극이다. 아니 혁명이다. 비극이 혁명이고 혁명이 비극이다. 그런 것이다. 사람이 죽고 민주주의는 그 피를 먹고 꽃을 피웠으니 그것은 혁명이고 비극이다. 그리고 여전히 아물지 않는 아픔이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다. 

▲ 백악관 울타리에 붙어 있는 희생자 추모 명판 2010년 4월7일 백악관 옥상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조준사격을 가했다. 이에 86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튤립혁명은 2차례 있었다. 1차 튤립혁명은 2005년 3월, 초대 대통령 아스카르 아카예프(Askar Akaevich Akaev)의 퇴진 요구로 시작되었다. 극심한 경제난과 계속되는 부정부패에 분노한 키르기스 국민은 정권교체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결국 대통령은 굴복하고 자리에서 물러나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후 두 번째 대통령인 쿠르만벡 바키예프(Kurmanbek Salievich Bakiev)가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그 역시 지속적인 권력투쟁에 휩싸여 경제를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하자 2010년 4월 2차 튤립혁명이 일어났다.

1차 혁명 때와는 다르게 대통령은 민심을 굴복시키려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이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결국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굴복하여 쿠르만벡 바키예프 대통령 역시 외국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현재 2차 튤립혁명일인 4월 7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아직도 일부 세력에 의해 5.18을 색깔논쟁화 시키는 우리를 생각하니 키르기스스탄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 우리는 5월 18일을 당당하게 국가 공휴일로 지정할 수 있을까? 자랑스러운 역사조차 검증의 대상으로 여기는 현실에 한숨만 나온다.

▲ 알라투 광장 2022년 피의 혁명이 있었던 광장은 그날을 잊은 듯 평화로웠다.


피로 지켜 낸 광장의 평화

2022년 7월, 혁명의 광장은 평화로웠다. 오후 햇볕이 내리쬐는 광장에는 시민들이 한가로이 사진을 찍거나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날 사람들이 쓰러진 자리에는 추모 기념비가 우뚝 서 있었고, 옥상에서 조준사격을 했다던 그 대통령 궁 백악관은 여전히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백악관은 현재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지 않아 주변 울타리는 거의 다 철거되어 있었다. 다만, 그날 시민들이 쓰러졌던 자리 주변의 몇몇 철제 울타리는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 철거하지 않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철제 울타리에 가보니 희생자 이름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추모 대리석판이 붙어 있었다. 희생자 명판을 보니 자꾸 광주 망월동 묘지의 희생자 명판이 겹쳐졌다. 


광장 국기 게양대 앞에는 소련식 군복을 입은 병사가 소련식 군인 걸음으로 교대식을 하고 있었다. 소련 냄새 물씬 풍기는 군인들을 보니 반공 이데올로기 교육의 부작용으로 공산주의, 사회주의 같은 단어들이 떠오르며 자꾸 민주주의라는 말과 엉켰다.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었던 소련 향기 때문이었는지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광장 한쪽에 서 있는 검은색과 희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희생자 추모 기념탑을 보니 튤립 혁명이 되살아나 안심이 되었다. 

▲ 국기 게양대 호위병 교대식 소련 향기 물씬 풍기는 군인들 모습이 이채로웠다.

          

▲ 레닌 동상 원래 광장 중앙에 서 있던 레닌 동상은 그 자리를 마나스 장군에게 내 주고 광장 뒤편으로 옮겼다. 어딘지 모르게 뒷방 늙은이 느낌이 풍겼다.


역사는 강물처럼 흐른다

원래 광장 중앙에는 거대한 레닌 동상이 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그 자리는 키르기스스탄 건국 영웅 마나스 장군에게 내주고 레닌 동상은 광장 뒤편 국립 역사민속박물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보니 시대의 혁명가 레닌이 뒷방 늙은이 마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 팔을 들고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모습은 여전한데 바라보는 곳이 모호해 보였다. 존재는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초라해 보였다. 아마도 소련 해체 이후의 자유분방한 현재의 키르기스스탄 모습을 본 내 기분 탓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역사는 강물처럼 흐른다.' 아무리 힘센 권력자도, 시대를 호령하던 혁명가도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 강물이 바다를 포기하지 않듯 역사는 오늘도 도도하게 흐른다. 피의 혁명이 있었던 그 자리에 서니 여행자답지 않게 괜히 진지해진다.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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