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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Oct 13. 2023

K 폼 美쳤다 3

K-소주에 취하다-그린 보틀의 비밀

‘What's that green bottle?’(저 초록색 병은 뭐야?)

낯선 땅에서 그러잖아도 영어 울렁증이 있는 사람에게 뜬금없는 영어 질문이 날아왔다. 돌아보니 갈색머리에 눈, 코가 눈에 꽉 차는 청년이었다. 눈을 끄게 뜨며 ‘me?’하며 모깃소리를 내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한다. 당황스러웠지만 휙 지나가는 말속에 ‘그린 보틀’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벽면 TV를 보니 한국드라마가 방영 중이었고 아저씨가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몇 년 전 라오스 여행 중 방비엥에서 있었던 일이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옆자리 청년의 얼굴은 불콰해 있었고 연신 싱글벙글 약간 들떠 있었다. 내 행색만 보고 어떻게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궁금했다. 조금 흐트러진 청년모습에 마음이 편해졌다. 워낙 좁은 술집이라 자연스럽게 합석이 되었다. 청년의 이름은 안토니오였다. 스페인 친구인데도 영어를 나보다 훨씬 잘하는 것에 조금 주눅이 들었지만 술의 힘을 빌어 몸짓언어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안토니오는 ‘K-팝’ 팬이라고 했다. K-드라마도 즐겨 보는데 볼 때마다 출현하는 초록병이 궁금하다는 거였다. 초록병 앞에만 앉으면 자기 얘기를 술술 풀어내기도 하고, 혼자 초록병을 잡고 울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초록병 목을 치기도 하는 드라마 속 장면들이 신기했다고 한다. 안토니오 말을 듣고 보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K-드라마에 소주병이 엄청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의 모든 영화, 드라마 심지어 뮤직비디오 속에도 등장하는 초록병의 정체가 외국인들 눈에는 궁금할 만했다. 생각해 보니 오징어게임 속에서도 초록병이 등장했었다.


주거니 받거니 기분이 좋아져 더 대담한 콩글리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토니오는 콩글리쉬가 신기했는지 아니면 K-소주 얘기가 흥미로웠는지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소주를 무척 사랑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연애할 때나 헤어질 때나 상갓집에서나 결혼식장에서나 그린 보틀(초록병) 소주는 항상 한국인과 함께한다. 소주는 곧 한국인의 소울메이트다.’ 안토니오는 내 설교에 감복했는지 한국에 가면 반드시 한번 마셔보겠다고 다짐을 했다. 한국 가면 꼭 연락하겠다고 도장 찍고 복사까지 했는데 안토니오는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 코로나 때문에 발이 묶인 거라 생각하고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안토니오’는 손흥민 고생시켰던 콘테 감독과 같은 이름이었네. 

‘안토니오!’ 혹시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꼭 연락해라. 

‘그래 나야 나, BH’


원래 소주는 고려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한 우리나라 전통주로 쌀, 밀, 보리 등을 원료로 발효시킨 후 증류하여 만든 술이다. 이렇게 증류한 원액 소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시는 소주보다 도수가 높아 30, 40도, 50도 등으로 출시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시는 초록병 소주는 희석식 소주다. ‘희석식’이라는 표현 때문에 화학주로 오해하면 안 된다. 희석식은 알코올 도수를 적정하게 조절하기 위해 물을 섞었다는 표현이다. 희석식 소주는 쌀, 보리, 고구마 등 곡물 원료로 주정을 만들어 물과 희석하고 여기에 감미료 등 여러 인공첨가물을 첨가하여 만든 대중주다. 

지금이야 대부분 소주가 16.5도지만 이전에는 25도로 독한 술이었다. 1998년 참이슬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23도 소주를 출시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주류회사들의 도수 낮추기 경쟁이 시작되었다. 도수를 낮추면서도 소주 본연의 목 넘김과 맛을 살리는 것이 포인트였다. 살아남기 위해 주류회사들은 품질 향상 경쟁에 사활을 걸었다. K-소주는 지금의 전 세계 최고로 많이 마시는 증류주가 되었다. 영국 주류전문매체 ‘드링크 인터내셔널(Drink Internationals)’은 2021년 발표에서 21년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는 하이트 진로라고 밝혔다. 하이트 진로는 2021년 한 해 동안만 무려 9450만 상자(상자당 9리터 기준)를 판매해 압도적 1위를 기록했다. 세계는 지금 K-소주에 취해 있다.


‘K-소주’ 인기는 ‘K-컬처’ 바람을 타고 더욱 치솟고 있는 추세다. 우리나라에서는 반짝 인기를 끌다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순하리’ ‘자몽에 이슬’ 등 과일소주들이 동남아를 비롯 미주지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동남아에서는 이러한 인기를 등에 업고 짝퉁 과일소주 출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2022년 10월 17일 자 뉴데일리경제 보도에 따르면 태국, 캄보디아에서 판매되고 있는 ‘건배’의 경우 우리 소주병과 똑같이 생긴 360ml 그린보틀(초록병)에 한글로 상표가 붙어 있어 한국인도 구분하기 힘들다. 제품 종류도 15% 소주 제품부터 ‘건배 프레시 12%’ ‘복숭아, 그레이프프루트, 젤리, 요거트 등 각종 과일향 소주가 출시되었다. 태국의 또 다른 짝퉁 ‘태양’ ‘나르바나 하이’, 필리핀의 ‘오빠 OPPA’, 인도네시아 ‘대박’ ‘참좋은’, 미얀마의 ‘자연 THE JAYEON SOJU’, 캄보디아 ‘김김KIMKIM 소주’ 등 동남아에는 지금 과일향 소주 짝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최근에 대만까지 합류하여 짐루(JIMLU) ‘금이슬’ ‘오빠 주세요 Oppa JuseYo’ 등을 출시하였다고 하니 ‘K소주’의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이런 지나친 K며듦을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난감할 뿐이다.

짝퉁소주 건배(태국)
사진 좌)참좋은(인도네시아), 자몽행복한(태국) 등 짝퉁 소주와 참이슬, 자몽에 이슬 등(하이트 진로) 눈으로 구별하기 힘들다/ 태국 마트에 진열 되어 있는 짝퉁 소주들(사진 우)

소주는 한국인의 삶 속에 녹아들어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가성비 좋은 대중주다. 잠시 호텔경영학을 배웠던 시절이 있었다. 다른 수업은 다 제겼어도 술에 대해 배우는 수업은 빠진 적이 없었다. 그때 교수님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전 세계 술을 많이 마셔봤는데 소주만큼 싸고 좋은 대중주는 없더라. 이렇게 괜찮은 소주를 마실 수 있는 한국인은 축복받은 것이다’

여행자 흉내를 내며 몇 나라 술을 섭렵하다 보니 교수님 말대로 소주가 지천인 한국은 술꾼들에게 축복인 나라가 맞는 것 같다. 

오늘 저녁 축구 보며 소주 한 잔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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