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넘쳐나는 시대, 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상고온으로 봄꽃들이 순서를 어겨가며 뒤죽박죽 피고 있다. 아직 4월인데 어제는 날씨가 30도를 넘었다고 하니 봄인지 여름인지 분간이 안 가는 날씨다. 꽃구경 계획을 잡았다면 빨리 다녀와야지 우물쭈물하다 휙 지나가버리겠다. 이게 다 우리 인간들이 지구를 마구잡이로 파먹은 결과이니 뭐라고 말하기도 미안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두연두하고 알록달록한 초록의 산천은 여전히 내 마음을 들뜨게 하니 참 좋은 계절임은 분명하다.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지금 같은 봄이야말로 책 읽기 최고의 계절이라는 생각이다. 가을 낙엽도 운치 있지만 봄바람 살랑살랑 부는 곳에서 흩날리는 꽃비 맞으며 책 읽는 기쁨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내 맘 같지 않은가 보다. 책이 안 팔려 망하는 서점과 출판사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하긴 2023년 기준 13세 이상 한국인 연간 평균 독서량이 7.2권이라 하니 월평균 1권도 안 읽는 셈이다.
간서치(看書癡)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지나치게 책을 읽는 데만 열중하여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한마디로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이다. 간서치 중에 최고의 간서치로 꼽히는 이가 바로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다. 그는 평생 벗들과 책 읽는 즐거움으로 살았고 스스로를 간서치라고 불렀다. 그는 조선 후기 문예부흥과 실학파를 이끌었던 박지원,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평생을 어울리며 시와 문장을 짓고 사회 현실과 학문에 대해 서로 토론하며 시대를 앞선 지식인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평생을 책과 함께 살았던 그의 삶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그가 21세 때 지었다는 간서지전(看書痴傳)이라는 글로 전해져 온다. 간서치전은 불과 184자의 짧은 글이지만 그가 얼마나 책 읽기에 미쳐 살았는지 잘 표현되어 있다. 책이 넘쳐나도 읽지 않는 시대, 그 전문을 한번 읽어 보자.
‘목멱산(남산) 아래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는데, 어눌(語訥)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고, 성품은 게으르고 졸렬해 시무(時務)를 알지 못했으며, 바둑이나 장기는 더구나 알지 못했다. 이를 두고 다른 사람들이 욕을 해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해도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으며, 오로지 책만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 배고픔이나 아픈 것도 전연 알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21살이 되기까지 하루도 손에서 고서(古書)를 놓지 않았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다. 그러나 동창과 남창·서창이 있어, 해의 방향을 따라 밝은 곳에서 책을 보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기서(奇書 : 기이한 책)를 구한 줄 알았다. 자미(子美 : 두보의 자)의 오언율시를 더욱 좋아하여, 병을 얻어 끙끙 앓는 사람처럼 골몰하여 웅얼거렸다. 심오한 뜻을 깨우치면 매우 기뻐서 일어나 왔다 갔다 걸어 다녔는데, 그 소리가 마치 갈까마귀가 우짖는 듯했다. 혹 아무 소리도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지도록 보기도 하고 혹은 꿈꾸듯이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니, 사람들은 그를 두고 '간서치(看書痴 : 책만 보는 바보)'라고 했다. 이 또한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의 전기(傳記)를 지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이에 붓을 떨쳐 그에 관한 일을 써 '간서치전(看書痴傳)'을 만들었다. 그 이름과 성은 기록하지 않았다.
-『청장관전서』 「간서치전」전문 해설
봄날이 간다.
꽃잎 흩날리는 봄날 꽃비 맞으며 읽는 한 권의 책,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