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을 아는 한국인
“참 멋지게 살다 가신 분이지”
여덟 남매를 길러낸 아버지는 환갑 되는 해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어렵기만 한 존재였다. 보수적인 종갓집 분위기 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무뚝뚝한 충청도 남자라 그랬던 것인 것 나는 청년기까지도 아버지와 별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했던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거의 알지 못했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었다. 제대 후 두 달 만에 그런 아버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갓 제대하고 갑자기 닥친 일이라 어안이 벙벙한 채로 사흘상을 치러냈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평을 들었다.
“자네 어른은 참 멋지게 살다 가신 분이지”
경황없는 중에도 ‘멋지게’라는 말이 가슴 깊이 들어왔다. 벌써 30년도 훨씬 넘었지만 여전히 나는 아버지 하면 ‘멋’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멋’
국어사전에는 멋에 대해 ‘차림새, 행동, 됨됨이 따위가 세련되고 아름다움 또는 고상한 품격이나 운치’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멋이란 외형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내면의 됨됨이까지 포함하며 아우라로 품어져 나오는 고상한 품격까지 아우른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멋은 한국인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고상한 미적 찬사다.
“야 너 정말 오늘 예쁘다”라는 말과 “오늘 너 정말 멋있다”라는 말은 미적 표현 범위가 다르다. ‘멋있다’라는 말이 ‘예쁘다’ ‘귀엽다’ ‘잘 어울린다’ ‘품격 있다’ 등까지 아우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옷은 예쁘게 입는 것보다 될 수 있으면 멋지게 입어야 한다. 사랑도 예쁘게 보다 멋지게 해야 하고, 한 번뿐인 인생도 막연하게 잘 사는 것보다 멋지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째 내고 어디가?”
“때 빼고 광 좀 냈구먼”
“아이고 마~ 깔롱 마이 부렸네”
여기서 말하는 ‘째’ ‘광’ ‘깔롱’은 모두 ‘멋’과 통하는 말이다. 어딘 가에 신경 좀 쓰고, 멋 부리고 나왔다는 말이다. 이처럼 멋을 아는 한국인은 멋 내기를 좋아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것 중에 하나가 한국인들이 평상시에도 옷을 깔끔하게 잘 입는 점이라고 한다. 바로 한국인들의 멋 내기를 본 것이다. 의관정제 문화가 있는 한국인들은 이처럼 옷 하나를 입어도 멋스럽게 입으려고 노력한다.
제목을 ‘멋’이라고 붙여도 어울릴 만한 멋들어진 시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로 시작하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다. 시인의 말처럼 한국인의 멋은 자세히 보아야 하고, 오래 보아야 알 수 있다. 화려하지 않으나 자세히 뜯어보면 멋스럽고, 수수해 보이지만 오래 보고 있으면 그 속에 숨어 있는 멋이 보인다. 한국의 미가 그렇다. 미술사학자 김원용선생은 한국의 미를 ‘자연의 미’라고 설명하며 ‘비조화의 조화’ ‘무기교의 기교’의 그 오묘하고 불가사의한 조화의 상태를 ‘멋’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신광철 한국문화켄텐츠 연구소장은 한국문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인공적인 멋을 죽이고 자연적인 멋을 끌어오는 탁월한 능력이라고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꾸안꾸’ 상태, 즉 꾸민 듯 안 꾸민 듯 끌리는 상태가 바로 멋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비조화의 조화’ ‘무기교의 기교’ 자연의 멋을 아는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는 최근 세계 여성들을 홀리고 있는 K뷰티 속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K뷰티를 좋아하는 이유는 화장품 자체의 품질도 품질이지만 특히 한국인들의 화장법을 좋아한다고 한다. 이 K화장술의 비기가 바로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럽게 멋을 내는 꾸안꾸 화장법이다. 이렇게 멋을 아는 한국인들이 K뷰티뿐만 아니라 세계 디자인, 패션계에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믿는다.
한국인의 멋에는 ‘비조화의 조화’ ‘무기교위 기교’ 자연의 멋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이기웅교수는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멋은 비정제성, 파격성, 일탈의 미를 추구하는 독특한 미적 성향이라고 말한다. 이는 옆 나라 일본의 철저하고 완벽한 계산에 기반을 둔 미적 성향과 다르고 대칭성을 강조하는 중국의 미적 성향과도 다른 한국인의 독특한 성향이다. 그렇다고 한국인이 규칙이나 규정을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규칙은 지키되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규칙보다 내적인 생명력, 즉 본질의 존재감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어령 선생도 비슷한 의미로 한국인의 멋을 구속이 아니라 자유를, 통제가 아니라 해방을, 타율이 아니라 자율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한국인의 이러한 비정제성, 파격, 일탈의 멋 내기를 제대로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시장이다. 동묘시장은 서울 멋쟁이들의 핫플레이스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일탈, 파격의 미와 조화, 융합의 미가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패션으로 확실하게 보여준다. 동묘시장을 방문했던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키코 코스타디노브(Kiko Kostadinov)는 멋쟁이 동묘패션에 반해 자신의 SNS계정에 "세계 최고의 거리. 스포티(sporty)함과 캐주얼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감한 믹스매치 정신"이라며 놀라움을 표했다. 패션업계에서 그는 우아한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통상적 디자인을 거부하는 '못생긴 패션', ‘고프코어(실용적이지만 촌스럽고 투박한 아웃도어 패션)'를 선도한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한국인들의 멋과 통하는 디자이너라 할 수 있다. 키코 코스타디노브가 동묘에서 느낀 패션미가 바로 통일적인 양식이나 일반적이지 않고 격식에서 벗어난 비정제성, 파격, 일탈의 멋 내기인 한국의 멋이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인의 멋은 격식을 파괴하는 비정제성, 파격, 일탈의 멋 내기, 비조화의 조화, 무기교의 기교, 자연의 멋까지 포함한 최고의 고상한 미적 찬사다. 이런 미적 찬사를 한국인들은 그저 옷을 입거나 꾸밈을 표현하는 데에만 쓰지 않고 보다 확장된 개념으로 쓰기도 한다. 지나치게 꼼꼼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보고 ‘멋대가리 없는 놈’이 되고, 주변 상황 개의치 않고 행동하는 사람은 ‘제멋대로 사는 놈’이 된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나도 한 번뿐인 인생 멋지게 살지는 못할 망정 ‘멋대가리 없이 살지는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 쓰윽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