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큰 죄로 몰빵 곤봉 세례를 받다

비폭력 뒤에 숨은 폭력

by 청년홈즈

1992년, 제대 후 복학한 학교 분위기는 영 낯설었다. 80년대처럼 최루가스가 난무하지 않았고 거의 매일 있었던 집회나 시위도 없었다. 캠퍼스엔 '신세대'라고 불리는 외계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들은 꼬리표도 안 뗀 모자를 쓰고 '난 알아요'를 외치며 하나같이 헐렁한 옷에 똥을 한 덩어리 싸지른 것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외견상 활기차 보였지만 복학생 눈에는 뭔가 공허해 보였다.


가끔 집회를 하긴 했는데 그 분위기는 예전과 사뭇 달랐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달라진 사회환경도 있었고 문민정부네 뭐네 하면서 집회 이슈가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그나마 1993년에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반대가 큰 이슈였다. 특히 수입 농산물 개방과 관련하여 전국의 농민들과 연대하여 거리 집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80년대처럼 돌을 던지거나 각목을 휘두르지 않았다. 비폭력 평화집회였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전경들의 숨겨진 폭력을 묵인하는 꼴이 되었다. 언론은 몇몇 학생이 방패를 차거나 밀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학생운동의 폭력성을 부각했지만 실상은 이와 정반대였다. 생각해보라 맨몸으로 스크럼이 전부인 학생들과 중무장한 전투경찰이 밀착 대치하면 누가 더 약자인지.


93년 어느 날, 종로 3가 가두시위도 비폭력 평화집회였다. 사전집회를 마치고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거리 행진을 나섰다. 방패와 곤봉으로 중무장한 전경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우리를 막았다.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온몸으로 방어벽을 밀었다. 밀당이 계속되는 사이 비폭력 평화집회도 점점 깨져갔다. 몇몇의 욕설과 이에 대한 응수 그러는 사이 감정이 격해지자 전경들이 살짝살짝 곤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모두 양팔을 어깨에 올려 스크럼을 했기 때문에 전경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무방비 상태였다. 특히 스크럼찬 학생들 중 키 큰 친구의 머리는 전경들의 집중 곤봉 세례를 받아야 했다.


내 옆에 섰던 백군은 키가 190cm 가까이 되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있었던 셈이다. 내 머리는 그 친구 덕에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우리가 스크럼을 짜고 ‘우~’ 하며 방패벽을 향해 돌진하면 사방 곤봉들이 모두 백군의 머리로 모여들었다. 심지어 뒷줄에 섰던 전경들도 손을 뻗어 그 친구 머리 위로 곤봉을 날렸다. 뒤로 빠졌다 다시 ‘우~’하며 돌진하면 백모군 머리통으로 ‘두두두둑’하는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한 참을 밀치다 뒤로 빠져 스크럼을 풀면 백모군은 아픈 머리를 쓰다듬느라 정신없었다.

다시 스크럼을 짜고

‘우~’ 밀면‘두두두 두둑’

또다시 ‘우~’ 밀면 ‘두두두둑’


그날 백군은 아픔을 참느라 고역이었고 우리는 그 모습에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백모군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날 가투(가두투쟁)는 평소보다 무지 길게 했었다는….

시대가 만든 웃픈 코미디였다.


이 추억을 떠올리노라니 세상 곳곳에 비폭력으로 포장한 폭력들이 눈에 들어오며 쓸데없이 진지해진다. 평화란 숨어 있는 폭력, 보이지 않는 폭력을 찾아내어 없애는 일이다. 여전히 세상 곳곳에는 숨어있는 폭력 천지다.


몇 년 전 겨울 내내 촛불을 들며 후배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더 치열하게 싸우고 바꿔내지 못해 이런 나라 꼴을 물려준 거 같아서. 그때 더 숨어 있는 폭력까지 찾아 내려는 마음을 모아 내지 못한 것 같아서. 그 미안함을 죽는 날까지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우주 평화주의자로 살겠다는 약속으로 대신한다.


그나저나 백군이 이 글을 읽으면 절교하자고 하지 않을까?

백모 대일군아 화내지 마 네 이름은 절대 얘기하지 않았…


미안! 형이 나중에 술 사주께.


전경.jpg 어느 평화집회의 모습(글의 내용과 관련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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