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 때는 가해자였다.
1987년 격변기, 나는 재수하여 대학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나는 풍물동아리에 가입했다. 그곳에 가면 순진했던 내 친구들이 왜 데모를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재수생 시절,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난 친구가 대통령에게 쌍욕을 해대서 놀랐다. 데모꾼들에게 세뇌당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순진했던 친구를 저렇게까지 변하게 한 데모꾼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나는 세뇌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운동권 동아리라는 풍물패에 가입했다.
첫 세미나 책은 ‘대학 문에 서서’라는 얇은 책이었다. 세미나라는 이름도 생소했고 주입식 교육만 받아오다 토론이라는 걸 처음 해 보니 이야기는 늘 산으로 올라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열심히 토론했고 별것 아닌 주제에도 치열하게 싸웠다. 세미나가 끝나면 회기역 근처 파전골목으로 몰려가 막걸리로 저녁을 대신했다. 회기역 파전골목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지금은 삐까번쩍 큰 빌딩이 올라간 파전 거리로 변해있지만 그 당시는 고만고만한 파전집 서너 개가 붙어 있는 허름한 거리였다. 학생들이 자주 찾았던 이유는 술 값도 쌌지만 두툼하게 나오는 파전이 일품이다.
“야! 이게 파전이냐? 파자지”
언젠가 처음 데려간 친구가 파전을 보더니 그 크기와 풍성함에 놀라 소리쳤다. 거짓말 같지만 진짜다. 몇몇 파전집은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잇고 있다. 주말에 나들이 겸 한번 가보는 것으로 궁금증은 풀기 바란다.
낮에는 집회를 쫓아 거리를 헤매다 저녁이 되면 축축한 지하 동아리 방으로 숨어들었다. 그 지하방에서 우리는 밤새 막걸리를 마시며 토론을 했고 울분을 토했다. 암울했던 시절 신입생의 일상은 그러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캠퍼스는 늘 최루가스가 범벅되어 있었어도 알싸한 낭만이 깔려 있었다. 가슴에 솟구치는 분노를 달고 살았어도 참 좋은 시절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것이 낭만인 줄 몰랐고 그저 출구 없는 암울함으로만 알고 살았다.
나는 풍물동아리 가입과 함께 소위 말하는 운동권 세계로 입문했다. 실제 집회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1987’이라는 영화에서 나왔던 것처럼 지하로 떠돌던 광주항쟁 비디오를 보고 난 후였다. 소낙비처럼 노이즈가 내리던 화면 속 5월 광주 모습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군인들은 곤봉으로 사람들을 때리고, 무릎 꿇은 시민들을 군홧발로 찼다. 곤봉을 든 군인들이 축 쳐진 사람을 질질 끌고 다녔다. 실제가 아닌 무슨 공포영화 같았다. 가슴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어떻게 같은 국민에게 저런 짓을, 어떻게 민간인에게 총을, 어떻게 저런 자가 대통령을……’
강의실보다 집회 유인물에서 더 세상 보는 눈을 배워 나갔다. 집회에 참여할수록 더 많은 진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들이 모여 점차 분노가 되었다. 혈기왕성한 청년의 분노는 가끔 오버를 했다. 가끔 집회 선두의 전조(제일 앞에서 가두 지휘하는 사람) 지휘를 따르지 않고 몰래 화염병 두세 개를 더 던지기도 했다. 교문 싸움은 늘 정문을 뚫지 못하고 흩어졌다. 번번이 전경들이 쳐 논 그물망에 막혀 최루가스 듬뿍 마시며 해산하기 일쑤였다. 뭔가 작전을 짜면 충분히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는 선배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경 중에는 가끔 학생들에게 작은 돌멩이를 조준하여 던지는 얄미운 전경들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가 전경들이 던진 돌에 맞았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시퍼렇게 멍든 상처를 보며 복수를 다짐했다.
얼마 후 기회가 왔다. 6월 항쟁 언저리 고려대에서 대규모 연합집회가 있었다. 근처 대학 수천 명(87년 6월 항쟁 즈음 집회 규모는 어마어마했다)이 모여 출정식을 마치고 고려대 정문을 돌파하려 했지만 견고한 전경들의 저지선을 뚫는 건 불가능했다. 시위는 고려대 주변 담을 사이에 두고 국지전 양상이었다. 친구와 둘이 측백나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전경 몇 명과 투석전을 펼칠 때였다. 전경 1명이 계속 우리를 향해 작은 돌을 던졌다. 나는 그가 던진 돌을 집어 들었다. 맨질맨질 손에 딱 잡히는 자갈이었다. 어릴 적부터 금강에서 갈고닦은 물 수제비 뜨던 실력을 발휘할 기회였다. 그 얄미운 전경의 무릎을 정조준하여 복수의 기운 담아 있는 힘껏 던졌다. '악' 비명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전경이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던질 때까지는 분노가 컸었는데 막상 눈앞에서 전경이 쓰러지니 겁이 났다. 어쩔 줄 몰라하다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화장실에 숨어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나와 그 전경을 찾아보았다. 멀리 닭장차 근처에 그 전경이 무릎을 걷어 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럼에도 가슴에 미안함이 올라왔다. 그때 난 깨달았다. 폭력을 똑같은 방법의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35년이 넘었다. 늦었지만 그때 그 전경님께 사과의 마음을 올린다. 더불어 시대의 폭력 희생자들이었던 시위 학생, 이를 막아야 했던 전경들 모두에게 위로를 보낸다.
'87년 5월 말쯤, 고려대에서 시위 진압 중 측백나무 사이로 날아온 돌에 무릎 부위를 맞은 전경님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미안합니다. 용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