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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Nov 11. 2019

양곤에도 을지로 순환선이 있다.

여행자의 나라 미얀마 그 일상의 얼굴-네 번째, 양곤 외곽순환열차

“어제 잘 들어갔냐?” 

“우이 씨~ 밤 12시에 들어갔어”

“뭔 소리야? 말이 돼?”


양곤 순환열차를 타보니 잊었던 30여 년 전 ‘8시간 증발사건’이 떠올랐다. 시대는 암울했어도 80년대 캠퍼스 시절은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 신입생이었던 어느 봄날 아침부터 막걸리를 사 들고 꽃 대궐 같은 캠퍼스 뒤편으로 숨어들었다. 우리는 진달래 그늘 아래 술상을 차려놓고 마치 ‘송강’이라도 된 듯 ‘꽃 꺾어 산 놓고’ 술잔을 돌렸다. 비록 순대 한 점의 박주산채(薄酒山菜) 술판이었지만 봄 향기에 취하고, 우울한 시대의 울분에 취해 우리들은 금세 떨어진 진달래처럼 흐드러졌다. 외상 술로 2차를 끝냈을 때 우리 상태는 새벽 3시를 달렸지만 밖은 여전히 벌건 대낮이었다. 분명 그 시간에 헤어졌다. 그런데 친구 녀석은 밤 12시에 집에 들어갔다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었다. 


전철을 탄 녀석은 시청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는데 눈을 떠보니 제물포역이었다 한다. 정신을 가다듬고 반대편 기차를 탔는데 다시 눈을 떠보니 이번에는 의정부역이었고 다시 전철을 타고 겨우 2호선으로 갈아탔다 했다. 그렇다고 해도 늦어도 밤 9시면 집에 도착했어야 했다. 3~4시간이 비었다. 자기는 분명 2호선은 제대로 갈아타고 제대로 내렸다는 거였다. 사라진 시간을 추적을 해보니 바로 순환선이 주범이었다. 2호선으로 갈아타고 잠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두 바퀴는 돌았던 모양이다. 한 숨 자고 눈을 떴을 때 마침 자기 내릴 역 근처여서 자면서 순환선을 돌았는지 몰랐던 거였다. 시간 계산을 해보니 대충 알리바이가 맞았다. 내가 추리한 ‘8시간 증발 사건’의 전모다.


양곤에도 순환열차가 있다.

대부분 대도시의 순환선은 자본주의 상징으로 도시를 돌며 도시를 키워 간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은 순환선을 타고 어제 같은 오늘을 돌며 살아간다. 도시생활이란 다 거기서 거기다. 서울의 을지로 순환선도 그렇고 도쿄의 순환선도 그랬다. 하지만 모든 순환선이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 외곽을 도는 순환열차는 달랐다. 도시화의 상징 같은 다른 대도시 순환선과는 다르게 양곤 외곽순환열차는 오히려 도시에서 소외된 듯한 모습이었다. 워낙 기차가 낡고 달리는 것도 느릿느릿 걸음마 속도라 더욱 그런 느낌을 주었다.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 또한 기차 열량 사이를 통과해 건너편으로 간다든가, 일부 차량에는 문도 없이 운행을 하는데도 자연스럽게 타고 다니는 모습이 우리가 기차를 대하는 것과 달랐다. 마치 시골 사람들이 경운기 대하듯 했다.

양곤 외곽순환열차: 양곤에도 을지로 순환선이 있다.

피곤에 지친 번잡한 하루, 

낯선 서울에 

오늘도 어제처럼 

돈도 싣고 가난도 싣고

내 삶을 싣고 

돌고 돌고 또 도는 을지로순환선

       -‘을지로순환선’ 1987년 어느 날


명성이 자자한 양곤 외곽순환열차를 타보니 스무 살 시절 유치하게 끄적거렸던 글이 소환됐다. 시골 살던 촌놈의 낯선 서울생활은 기대와 달리 녹녹하지 않았다. 아마도 술 취한 젊은 청춘이 어느 밤 감정에 복받쳐 끄적였을 게다. 양곤 외곽순환열차에도 미얀마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가 실려 있었고, 수많은 미얀마인들의 희로애락이 실려 있었다.


▲타달리(Tadalay)역: 기차역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허름한 모양새였다.


이거 실화? 차 삯이 여전히 200짯(한화 약 250원)

한 번쯤 양곤 순환열차를 타보고 싶었는데 기회는 떠나는 마지막 날 찾아왔다. 바간에서 심야버스로 양곤 아웅 밍갈라(Aung Mingalar)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한숨 잔 후 마침 게스트하우스 근처에 기차역이 있어 순환열차를 타고 나가 양곤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택시로 구불구불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니 허름한 타달리(Tadalay)역이 보인다. 


명색이 기차역인데 우리가 상상하는 역은 없었다. 그럴듯한 간판 하나쯤 기대했건만 없었고 그냥 길가에 기찻길이 있고 50~60년은 되었음직한 막사가 있을 뿐이었다. 흘러간 영화 속 장면처럼 판자촌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모습과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철로가 이채롭다. 기차역사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역사 안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인지 근처 부랑자인지 사람들이 앉아서 잡담을 하거나 누워 졸고 있었다. 역 안에는 노점상이 바닥에 헌책을 수북하게 늘어놓고 팔고 있었으며 어떤 아주머니는 얼음덩이를 걸어 놓고 녹인 물을 작은 망에 걸러서 팔고 있었다. 


표 파는 곳을 찾으니 예전 우리나라 시내버스 토큰 팔던 곳이 생각나는 조그만 창구가 하나 보인다. 200짯을 주고 표를 구입했다. 직원에게 쉐다곤 파고다를 간다고 설명하니 미얀마 말로 열심히 설명했다. 우리가 못 알아듣는 것 같자 친절한 아저씨는 창구에서 나와 직접 철길까지 인도하며 방향을 알려준다. 그러더니 차표 뒤에 미얀마 글씨로 뭐라 적어 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내려야 할 역 이름을 적어준 것이었다. 정작 기차에서는 그것을 잊고 손짓 발짓으로 간신히 쉐다곤 파고다 가는 역을 알아냈다. 생각해보니 그것 또한 여행의 소소한 재미였다.


미얀마 차표 시간, 이거 얼마나 믿어야 할까?

단돈 200짯에 표를 구입하고 차 시간을 물어보니 10분 후에 온다고 한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교통편 시간은 참고만 하면 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 커피믹스 한잔을 시켰다. 미얀마 타임을 생각하고 30분은 기다리겠거니 하며 시켰는데 웬일인지 15분 정도 지나니 기차가 느릿느릿 들어왔다. 이번에 가보니 착하게도 양곤 순환열차 차표 값은 여전히 200짯이다.

▲기차표: 200짯이었는데 친절한 아저씨는 차표 뒷면에 내릴 역을 손글씨로 써주었다(좌). 착하게도 여전히 차표 값은 200짯이다(우)


▲양곤 순환열차: 느릿느릿 역사로 들어오는 순환열차 모습, 낡은 기차는 예전 비둘기호를 떠올리게 했다.

기차를 타보니 내부는 촌스런 파란 플라스틱 의자가 앞뒤로 한 쌍씩 마주 보게 되어 있었다. 최근에 다른 기차도 타보았는데 양곤 순환열차는 기차마다 내부 구조가 조금씩 달랐다. 어느 기차는 우리 전철처럼 양 옆에 의자가 있는 차량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내부는 낡고 조잡스러워 보였다. 승객의 안락함이나 편의보다는 그저 ‘이동용 탈것’에 충실한듯했다. 그러나 나는 지저분하고 불편하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였는지 생각보다 괜찮았다. 특히 함께 타고 가는 포장하지 않은 미얀마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좋았다. 

을지로 순환선이 서울 도심을 도는 코스라면 양곤 외곽순환열차는 도시 외곽을 크게 한 바퀴 도는 기차다. 그래서 그런지 서민들 이용이 많았다. 특히 오토바이 운행이 금지되어 있는 양곤(양곤은 군부가 운행을 금지시켜 오토바이가 없다)에서는 라인까, 버스와 함께 서민들의 발이 되고 있었다. 

최신형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이어폰을 꽂고 있는 청년, 붓다의 삶을 안고 졸고 있는 띨라신(미얀마 여자 수도승), 시내 나가는 아줌마들, 양복 입은 사람 등 기차 안에는 양곤의 삶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기차가 잠시 정차할라치면 갑자기 과일행상들이 나타나 시장 한구석처럼 저울로 과일을 달아 팔기도 했다. 이과일 저 과일 한 칸에 3명의 행상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기차 안이 아니라 시장 한구석을 온듯한 착각이 들었다.

▲순환열차에는 많은 잡상인이 들락거린다.

타봐야 아는 순환열차의 맛

순환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안내원이나 어디서 내리라는 안내방송도 들어 보지 못했다. 미얀마 사람들은 그런 것 없이도 다들 잘 알아서 타고 내리고 있었다. 마치 이정표 없이도 아랫마을 잘 찾아가는 우리 고향 사람들처럼 미얀마 사람들에게 순환열차는 그냥 삶의 일부로 옆 동네 찾아가는 길이 되어 있었다. 

좀 낡기는 했어도 나는 이런 미얀마 사람들의 삶을 태운 순환열차가 무척 좋았다. 옛날 비둘기호 같은 모습에서 정겨움을 느꼈고, 걸음마 속도로 느릿느릿 달리며 철로 주변 사람들의 삶을 구경하는 재미도 솔솔 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겉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양곤 순환열차를 타보라고 권하는 이유가 바로 이 맛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지만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여행은 꼭 사전에 많은 정보가 필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적당한 정보와 직접 체험하며 자기만의 느낌을 맛보는 것도 괜찮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도 있지만 너무 많이 아는 것은 병이 될 수도 있다.’

▲양곤 순환열차:양곤 순환열차 주변 경관(위) 기차에는 미얀마 삶들이 삶이 타고 있었다.(아래)


▲순환열차 주변: 양곤 순환열차는 느릿느릿 양곤 시내를 관통한다. 느릿느릿 돌며 주변을 구경하는 것도 순환열차의 매력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한 해 가는 게 순식간이다. 우리 사는 게 열두 달이 순환열차처럼 한 바퀴 돌면 1년이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는 하지 말자. 한 바퀴 돌면 순환열차처럼 또다시 새로운 열두 달이 나타나니까 말이다. 


미얀마 사람들 사는 모습을 좀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다면 꼭 양곤 외곽순환열차를 타보시라. 그렇다고 기대는 너무 하지 마시고, 기차가 기차지 별건 없으니까.

▲양곤 순환열차:양곤 순환열차는 친근하다.

☞알고 가면 좋은 정보:양곤 순환열차

양곤 중앙역을 기점으로 양곤 외곽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완행열차로 총 38개 역을 3시간~3시간 30분에 걸쳐 운행한다. 원래 외국인에게는 요금을 더 받았으나 지금은 현지인과 동일요금인 200짯 정도 내면 된다. 양곤 중앙역이 기점이긴 하나 아무 역에서 타고 아무 역에서 내릴 수 있다.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는 말도 있으니 방문하면 한번 타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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