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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Sep 02. 2020

윤희숙 의원님! 나는 가재입니다.

그냥 가재로 살게 해 주세요

얼마 전 SNS상에서 뜬금없는 가재 논쟁이 있었다. ‘나는 임차인입니다’란 짧은 연설로 용이 된 미래 통합당 윤희숙 의원이 SNS상에 올린 이른바 가재 성장론 얘기다. ‘교육의 역할은 용이 되고 싶은 가재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 가재들을 노력하고 성장하는 가재로 키워 어떤 개천에 흘러가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낼 역량을 갖추도록 돕는 것이다.’ 아마도 조국 전 장관의 ‘모두가 용이 될 필요는 없다. 가재, 개구리, 붕어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란 SNS 글을 빗댄 주장 이리라.


나는 윤의원의 교육 역할론에 대해 큰 틀에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교육의 목적을 ‘계층 간 이동의 사다리’로 인식하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교육이란 ‘행복한 삶을 위해 타고난 재능대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용으로 살아가던 가재로 살아가던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을 계층 이동의 도구, 즉 경쟁의 도구로 인식하는 윤의원의 주장에 반대한다. 아이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한 교육이라면 오히려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전락한 입시위주의 교육풍토부터 먼저 바꿔야 한다.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원인 1위는 수년째 자살이다.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최상위에 포진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뉴스도 아니다. 나는 이러한 청소년들의 자살 문제 해결이 윤의원이 지적한 수포자 양산 문제보다 훨씬 더 시급하다고 본다.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아이들이 줄지 않는 사회의 미래는 참으로 암울하다. 어른으로써 아이들에게 늘 부끄럽고 미안하다. 이렇게 높은 청소년 자살 원인이 바로 교육을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인식하는 것, 이에 따른 입시 위주의 경쟁교육풍토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다. 진정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수포자 양산의 현 교육시스템 문제 지적보다는 견고한 학벌중심 사회문제, 지방대와 수도권 대학 간의 격차 문제, 교육으로 인한 심화되는 사회계층 간 격차 문제 등 근본 원인인 사회구조적 문제부터 고민해 주길 바란다. 이런 사고 위에 수포자 구제니, 수월성 교육이니, 가재 성장론이니 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야 가재야 니 이름이 뭐였더라?” 

얼마 전 동창회서 나눈 대화다. 그렇다. 나는 가재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나를 진짜 이름보다 가재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 별명이 그리 싫지 않다. 내 학창 시절 고민이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가을, 국민윤리 시간이었던 듯하다. 중국 고사 중 위(魏) 나라에서 진(晋) 나라로 왕조가 바뀔 무렵(266년경) 사마씨 일족의 전횡에 등을 돌리고 대나무 숲에 들어가 세속과 교제를 끊고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다. 윤리 선생님이 근엄한 톤으로 그들의 죽림 생활을 설명할 때였다. “이들의 죽림 생활은 몹시 곤궁했다. 산속에 뭐가 있냐? 먹을 것도 없고……” 선생님의 근엄 투가 반박자 쉬는 틈을 타 나는 뜬금 포를 던졌다. “왜 먹을 게 없어요? 가재 잡아먹으면 되지” 이 한마디에 교실은 초토화되었다. 친구들은 책을 던지고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했다. 일격을 맞은 선생님은 붉으락푸르락 해진 얼굴로 교실을 왔다 갔다 하며 연신 “저 시키 봐라. 하~~ 참나! 에이~ 가재 같은 놈?”만 되뇌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선생님은 교실이 진정된 후 “에이 가재 같은 놈, 넌 가재나 잡아 먹고 살아라” 한마디를 던지고 수업을 이어 나갔다. 그 뒤로 난 가재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엄청나게 웃긴 상황도 아니었다. 평소 조용히 꼴찌를 빌빌거리던 수포자 녀석이 근엄한 윤리 선생님에게 한방을 날렸다는 점이 웃음 폭탄의 증폭제였으리라. 갑자기 나타난 음지의 반항아 한 명이 입시 경쟁에 찌든 친구들에게 활력소가 되었던 셈이다. 각지에서 모인 공부 쫌 한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3년 내내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과 불안감은 나만의 감정은 아니었던 듯하다. 


나는 나름 유명한 명문고(지금 기준 특목고)에 입학했지만 수포자 가재였다. 고등학교 졸업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용이 되지 못한(?)채 평범한 가재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용이 되지 못한 현재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가재로 살았던 지난 학창 시절에 대해 불만이나 미련을 갖지 않는다. 오늘 하루도 그저 내가 가진 업에 충실하며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데 일조하고픈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 내고 있다. 

나는 근 20여 년을 교육계에서 밥벌이하며 살았었다. 그러면서 어쭙잖은 교육 관련 책도 써낸 나름 교육전문가라고 자부한다. 교육전문가로서 가재 성장론 당사자인 가재로써 가재 성장론을 주장한 윤의원 님에게 한마디로 말을 전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윤의원님! 나는 가재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용 될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 가재들이 그냥 가재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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