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홈즈 Dec 20. 2020

고백합니다. 아버지!

30년 만에 고백

“어이~이등병!”
“이병 전병호”
갓 전입신고 한 막내는 다급한 고참 부름에 목이 터져라 관등성명을 외치며 달려갔다.
“야! 이등병 너 ‘정외과’랬지?”
“네 그렇습니다”
“사고 났다. 얘 손 쫌 봐봐라"
“네 에~???”
도로 작업 중 바위에 쓸려 다친 병사를 치료하라는 거였다. 1989년 늦가을쯤 강원도 화천 백암산 자락 GOP에서 있었던 거짓말 같은 실화다.

그렇다. 나도 가끔 잊고 살 때가 있지만 나 정외과 출신이다.
아버지는 내가 정외과에 다시 들어간 걸 무척 좋아하셨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아버지는 이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은 짤림) 다시 공부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먼저 다니던 대학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는데(그냥 내 느낌상) 그 당시는 호텔경영학이라는 과가 낯설었고 아버지는 아들이 왠지 '호텔뽀이'를 할 거 같아서였는지 모른다. 다시 학교를 간다고 하니 등록금 걱정은 하셨겠지만 아들의 진로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국문과를 지망했으나 형들의 반대로 당시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의 청문회 활약에 힘입어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정치외교학과에 내 맘대로 원서를 냈다. 실제 인기만큼 경쟁 율이 높아 주변에선 다 떨어질 거란 예상을 했으나 무난히 합격했다.
아버지는 얼마나 기쁘셨는지 동네방네 엄청 자랑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아버지 덕분인지 아니면 정외과라는 이름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10여 년 동안이나 대학생활 한 내 상황 때문인지 몰라도 방학 때 가끔 고향을 찾을 때면 나는 의대생이 되어 있었고, 문턱도 가보지 않은 서울대생이 되어 있었다.
“아이구 우리 서울대학생 오는구먼. 근디 병원은 언제 개원 한댜?”

아버지는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정외과 졸업은 고사하고 내가 복학도 하기 전 어느 겨울날 불현듯 우리 곁을 떠났다. 그게 벌써 30년 전이다. 이제 얼마 있으면 아버지 기일이다.

아버지! 이제 고백합니다. 사실은 다시 정외과로 학교 옮겼던 것은 아버지 바람대로 외무고시쯤 도전하려고 간 게 아니라 데모하다 짤리고(?) 더 빡씨게 데모하려고 갔던 겁니다.

근데 아버지! 고시 패스 안 했어도 저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그래도 잘한 거 맞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윤희숙 의원님! 나는 가재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