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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르 Mar 21. 2019

세탁기가 고장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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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의 세탁기가 고장났다.

더러워진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세제를 넣고, 물이 채워지고,

몇 시간이 지나 이제 세탁이 끝났겠지 널어야겠다,

세탁기 안을 들여다보니 세제가 풀어진 뽀얀물에 옷가지들이 그대로 축 쳐져 조용히 잠수하고 있었다.

세탁기가 돌아가지 않았네?

돌아가다 중간에 멈추었나?

세탁기는 처음부터 돌기를 포기한걸까,

이도 저도 시도해보다가 더 이상 돌기 힘에겨워 결국 이 물 속에 고요히 잠겨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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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동작 버튼을 눌러보았다. 세탁기는 돌았다. 왜인지 힘겹게 돌았다.

한참을 다시 잘 돌아가는 지 들여다보았다. 세탁기 겉과 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무슨 문제인지 모르는 채, 결국 모든 옷가지들은 탈수까지 깨끗히 마치고, 건조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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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이모님이 세탁기가 고장난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내셨다.

A/S를 신청하겠다고 답장을 하고 난 후, 한참 있다가 다시 이모님께 문자가 온다.

다시 해보니 세탁기가 잘 돌아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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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는 분명 전기를 공급하면 물을 붓고, 더러워진 옷가지들을 돌리고, 가능한한 세차게 돌아 탈수기능을 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에게 많은 편리함을 주는 기계일 뿐이다.

근데 기계도 가끔은 지칠 때가 있는가.

기계 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자신의 상태를 살펴달라고

살다 살다 한 두번 정도는 구호의 신호를 보내는가.

세탁기에 꼼꼼히 눈길을 주었던 날 그 이후,

세탁기는 멈추지 않았고, 언제 내가 멈춘적이 있었냐는듯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도 세탁기는 차가운 베란다에 우뚝 서서

더러워진 옷가지를 기다리고 탈수된 옷가지를 내어주며,

묵묵히 하루를 살아낸다.

참고 참고 또 참다,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는 빨랫감을 감당하지 못할 때까지.

누군가가 자신을 찬찬히 들여봐주는 날을 기다리며

또 다시 힘차게 삶의 모터를 돌리면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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